인조 잔디지만 초록초록한 잔디 위에 드넓은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2023년 2월 4일 입춘을 맞이해 노벤치 리그전이 시작되었다. 우리 풋살동호회 안에서 3팀으로 나뉘어 5개월간 총 9일, 각 2경기씩 총 18경기를 치르기로 했다. 각 팀 이름은 논스톱, 티키타카, 그리고 나의 팀은 정발산코끼리(줄여서 정코).
주말 일정에 풋살이 자연스럽게 끼어든 지 어느덧 9개월 차, 축구를 시작한 지 누적 112시간을 넘어서고 있다. 신호등이 깜빡거려도, 플랫폼에 열차가 도착해도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천천히 걷던 내가…… 뛰고 있다(아직 공의 속도에 한참을 못 미쳐 놓치기 일쑤지만 제법 멀리서 차준 공을 잘 받긴 한다. …받기만 한다. 돌아서서 연결하는 건 또 다른 단계다).
숨이 턱턱 막히다가도 조금 숨을 고르면 다시 뛸 수 있다는 걸 이제 알아간다. 아무도 밀지 않아도 혼자 넘어지는 게 참 신기했는데, 지금은 다섯 번 중 한 번만 그런다(지난 토요일에도 혼자 공 잡고 달리다 속도를 못 이겨(그렇게 빠르지도 않았습니다만…) 양 손바닥을 바닥에 쓸리고 말았다. 후끈후끈한 따가움이 좀 오래갔다). 필드에서 넘어지지 않기. 이게 첫 번째 목표다(목표는 작을수록 좋다).
여자들끼리 팀워크를 다지는 팀 스포츠를 시작한 게 아마… 까마득한 초등학교 시절 축구를 좋아하는 담임선생님 덕분에(옆반 선생님과 남자애들 데리고 축구하던 선생님) 일주일에 두 시간씩 여자애들은 피구를 해야 했던 그때 이후로 처음이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코로나 시국에 거의 3년간 주 5일 수영을 하던 체육관이 문을 닫고 있는 게 계기였다.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을 알았으니 계속 운동을 해야 할 텐데, 근력을 키우는 케틀벨도 기웃거렸으나 하찮은 나의 몸이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정형외과 도수 치료와 운동 치료를 4개월간 병행한 뒤 살 만해지고 나서, 먼저 축구에 빠져 있던 지인들이 보였다. 나도 한번 해볼까, 그래도 2002년 월드컵 때 한창 붉은악마 응원단으로 축구 경기를 꽤 보지 않았던가(읭?)
풋살화와 풋살 공, 신가드, 축구스타킹을 사고 어색하게 풋살장에 처음 들어선 그날. 발끝으로 공을 툭툭 건드려 보는데, 어? 이거 왜 재밌어? 내가 지금 공을 차고 있네? 인생에서 절대 친해지지 않을 것 같은 존재에게 어디서 오는지 모를 반가움이 느껴졌다. 별로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반 친구에게서 나의 최애의 흔적을 발견한 그런 기분 같은 것.
심판을 보는 백 코치님의 휘슬 소리에 맞춰 경기가 시작되었다. 축구와 다르게 풋살은 수시로 선수가 교체된다. 교체될 타이밍을 기다리며 응원을 주로 하다가 두 번째 경기 때 전반전에 투입되었다. 축구를 하다 보면 이기기 위해서 격해지는 감정 같은 게 나에게는 거의 없다. 축구를 이기면 좋고 아니어도 경험을 쌓는다는 마음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경기 중에 혼자 뭉클해지는 순간들이 참 많다. 늘 같이 수업 듣고 훈련하던 멤버를 마크할 때 눈만 마주쳐도 그냥 웃음이 난다(사람을 너무 좋아하나). 몸싸움이란 걸 하다가도 상대가 넘어질 것 같으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치지 않게 꼭 붙들어주다 껴안는다(다정한 사람들 같으니). 상대편이 골을 너무 멋지게 넣으면 나도 모르게 감탄의 박수를 친다(팀 분위기 해치지는 말자).
“공 봐야지, 공 보고 뛰어야지.”
저 멀리 우리 팀 키퍼가 멀리 공을 차려고 하길래, 냅다 최전방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이전 리그에서 우리 팀이었던 태경 님이 나를 막기 위한 수비수로 곁에서 같이 뛰면서 나한테 던진 말이었다. 공을 등지고 뛰면 당연히 공을 못 받는다. 백 코치님 수업 시간 내내 듣는 말인데 실전에서 또 잊어버린 나에게 태경 님은 본능적으로 조언을 해준다. 아 이거 정말 뭐야. 우리는 노벤치 아래에서 한 팀이라고 아까 맹세한 그거… 그거 맞죠? (꺄)
절실하게 이기고 싶어서 경기 끝나고 펑펑 우는 ‘골 때리는 그녀들’의 출연진들을 볼 때마다 저 감정은 뭘까 궁금했다. 쭈뼛쭈뼛 낯설었던 얼굴들이 매주 보면서 친근해지고 쉬는 동안 말 한마디 더 붙이게 되고, 팀으로 묶이면서 서로의 컨디션이나 경기 스타일을 조금씩 세세히 알게 되었다. 필드에서 뛰는 동안 아무리 내가 숨이 차도 우리 팀 선수가 치고 나가면 반대 방향에서 패스를 받아주기 위해 함께 뛰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내가 공을 잡아도 우리 팀 누군가가 “헤이”라고 외치며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해도 어느 방향으로 공을 줘야 할지 깨닫는다. 서로 격려하고 소리 높여 응원하고 “에디터리” “작가님” 큰 소리로 불러줄 때마다 우리 팀이구나, 마음이 든든해진다. 없던 힘도 끝까지 내보는 연습을 한다. 나는 못하니까, 스스로 작아지는 마음을 등 두드리며 한번 해보라고 밀어주는 멤버의 손길 덕분에 어깨를 펴고 공을 잡는다.
덕분에 일요일 아침마다 잠을 미루고 세수를 하고 스트레칭을 한 뒤, 풋살장으로 향한다. 이왕 일찍 일어난 김에 운동 나온 김에 2시간을 꽉꽉 채워서 땀을 흘린다(연장을 하면 했지, 미니게임 일찍 끝내주고 이런 거 절대 없다). 땀에 흠뻑 젖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다. 어떤 운동도 이렇게 시간을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몰입하게 만들지 못한다. 무엇보다 재미, 그 안에서 성실하게 쌓은 시간이 주는 성장이라는 보람이 있다.
매번 무엇을 가르쳐줄지 섬세하게 훈련 내용을 짜오는 백종건 코치님과 늘 시범을 함께 보여주는 멋진 주장 혜원님. 새로운 노벤치를 이끌어가느라 고생 많은 하나짱님, 일요 수업 멤버 지애님, 슈슈님, 지연님, 경선님, 은연님과 함께 뛰면 늘 웃음이 나고, 나를 포함해서 노벤치 언니즈를 맡고 있는 보라님, 선미님 덕분에 항상 유쾌하고, 발 빠른 화영님, 태경님, 보민님, 나영님, 지영님, 나연님 보면서 끝없이 감탄하고, 든든한 코칭을 해주는 진주님, 풋살화끈을 안 풀리게 묶는 법을 알려준 지현님, 볼 때마다 뭘 하나씩 주는 은영님, 엄청 빠른 서희님, 서희님의 단짝 한나님, 넘볼 수 없는 실력자들 나영님, 예지님, 오랜만에 봐도 반가운 수정님, 소연님, 미혜님, 혜란님, 슬기님, (이)하나님, 미리님 등 우리 노벤치 멤버들을 보며 많이 배운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이름과 얼굴이 연결되지 않는 분들까지도.
노벤치 나오는 글은 언제 쓸 거예요? 가끔씩 물어오는 쟈박님 덕분에 계속 써야지 써야지 마음에 꼭꼭 담고 있던 이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