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가 세상을 망치는 방법

by 현현

좌파 파시즘

우파와 좌파가 함께하는 드문 운동이 있다. 백신반대운동을 하는 이들은 접종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것은 파시즘이라고 한 목소리로 비판한다. 홍역을 예방하는 MMR 백신이 자폐증의 원인이라는 괴담이 퍼지면서 아이에게 백신을 맞히지 않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사라져가던 홍역과 볼거리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 코로나 백신을 둘러싸고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초기에 문재인 정부가 방역 정책을 과도하게 추진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이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벌어진 시행착오 과정이지 백신 거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녀에게 백신을 맞히지 않는 선택을 할 수는 있으나 그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는 쪽은 대체로 사회의 강자들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도 출퇴근할 수 있고, 영양이 균형 잡힌 음식을 먹고 건강 상태가 양호한 사람들은 백신을 맞지 않고도 감염 위험에서 비교적 안전할 수 있다. 근본주의자, 자연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백신을 거부한다. 하지만 집단면역이 달성되지 않으면 건강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이 더 쉽게 위험에 노출되고, 이는 전 사회적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다. 개인의 인권이 절대 가치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예방접종을 반대하거나 탈문명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삶도 가치 있는 삶이긴 하지만 그것을 사회적으로 부추겨서는 곤란하다.(20여 년 전 초창기에 교육매체 《민들레》도 이를 부추기는 우를 범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좋은 삶이어도 사회적 대안이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있다.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즘’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 부작용의 위험성을 알고 미리 고지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다. 의사나 약사의 역할이 그렇듯이. 근본주의는 부작용이 더 많은 독 같은 것이다. 드물게 약으로 쓰일 수도 있지만 다른 약을 찾아보는 것이 낫다.

파시즘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일찍이 임지현이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지적했듯이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도 파시즘적 행태를 보여왔다. 파시스트와 싸우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닮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교조 교사들 가운데 학생들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하다 논란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좌파나 우파나 자신들의 이념을 퍼트리는 수단으로 교육을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이단을 심판하는 종교재판이 되다시피한 한국사회의 정치 풍토는 교육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
2019년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서초동 시위가 한창일 당시 어느 진보 매체에서 만든 ‘검찰개혁 동요 메들리’ 영상이 논란이 되었다. ‘아기돼지, 엄마돼지’, ‘산토끼’, ‘상어가족’, ‘곰 세마리’ 등 널리 알려진 4편의 동요를 개사해 초중학생 십여 명이 합창하는 영상이다. ‘정치검찰 꿀꿀꿀 윤석열은 사퇴해’, ‘자한당 조중동 다 함께 잡아서 촛불국민 힘으로 모조리 없애자’ 같은 노랫말을 아이들이 천진한 표정으로 불렀다.

검찰의 권력 남용으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지만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적절할까? 설령 아이들이 자원했다 할지라도 부모나 주변 어른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동요를 합창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유겐트나 홍위병을 떠올리고, “아이들까지 정치 투쟁에 동원하는 파시스트들”이라는 우파의 비난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얼치기 진보의 이런 행동이 역풍을 불러와 총선과 대선에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를 퇴보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부작용


일 년 전 ‘김어준의 뉴스공장’ 폐지 공격에 맞서 추미애 의원이 “자유로운 편집권을 누리지 못하고 외눈으로 보도하는 언론들이 시민 외에 눈치 볼 필요가 없이 양눈으로 보도하는 뉴스공장을 타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데 대해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뉴스공장이 외눈인지 양눈인지는 논하지 않고 ‘외눈’은 “장애 비하 표현”이라며 시비를 걸고 나섰다. 맥락을 읽지 못하는, 그야말로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는 행태다.

‘눈 뜬 장님’도 장애 비하 표현이라고 딴지를 걸고 싶겠지만, 그러자면 국어대사전에 먼저 딴지를 걸어야 할 것이다. ‘눈 뜬 시각장애인’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이다.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혀 맥락과 언어의 쓰임새를 무시하는 것은 지적 미숙을 드러내는 것이다. 판소리 심청가를 부를 때 ‘심봉사’를 ‘시각장애인 심씨’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격이다.

흔히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에 근거해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는 진보를 가장한 언어 파시즘이다. 흔히 진보의 레토릭처럼 비치는 PC가 독선적인 태도 등으로 거부감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씹선비’, ‘진지충’ 같은 혐오 표현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우파만 PC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2018년 ‘정치적 올바름은 진보일까’라는 주제로 열린 <멍크 토론회>에서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프라이는 자신이 좌파이자 게이임에도 PC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역효과를 낳는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PC운동은 “우파 신병을 모집하는 하사” 역할을 할 뿐이다. 실제로 미국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는 PC를 공개적으로 저격함으로써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역설적으로 PC운동이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던 셈이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대통령 윤석열을 만들어내는 데 페미니즘과 PC가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을 것이다.

일찍이 ‘니그로(nigger)’라는 표현을 금지한 미국에서는 오늘날 ‘흑인(Black)’이란 표현도 금기시되면서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했지만, 배우 우피 골드버그와 모건 프리먼은 자신들이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아니라 ‘아메리칸’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언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인종과 성별, 성적 지향성 등 정체성을 대변하는 언어 정치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회를 끝없이 분열시킨다.(오늘날 미국에는 성소수자를 배려하기 위한 31가지의 성정체성 목록이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상 그 언어와 연관된 이들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있어도 ‘유럽계 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없는 이유다.

자크 라캉이 갈파했듯이 하나의 기표를 다른 기표로 대체하는 것은 언제나 제3의 기표를 낳는다. 얼룩을 가리기 위해 뭔가를 덧대면 거기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뭔가를 추가하게 된다. 부적절한 것을 지우거나 가리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것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모두에게 괜찮은’ 말은 없다. 정치적 올바름에 충실하다 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차별적이고 편견을 조장하는 언행을 삼가자는 PC운동이 선의에 기반하고 있지만,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정체성 정치-나, 나, 나...


‘나다움’과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문화는 보편성보다 개별성, 공공성보다 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정체성 정치가 횡행하는 배경이다. 사적인 예민함을 우선 가치로 설정하면 공론장이 무너진다. 정치적 올바름에 기초한 언어 검열이 공론을 무력화하는 것처럼. 문형준은 ‘정치적 올바름과 살균된 문화’라는 글에서 ‘정의롭고 깨끗하고 올바른 상황만을 지향하는’ 문화적 경향을 “살균된 문화”라 명명하면서 이는 “병든 문화의 다른 이름”이라고 비판한다(《비교문학》 73권). 다 큰 어른들을 마치 면역력이 없는 환자처럼, 여차하면 깨어질 유리그릇처럼 취급하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을 미숙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공중보건 명목으로 흡연을 금지하는 정책 또한 신자유주의 정체성 정치와 맥이 닿아 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 연기를 뿜으면서 비흡연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공공성에 반하지만, 비흡연자들의 건강과 심기를 배려해 흡연자들의 권리와 심기를 고려하지 않는 것 또한 공공성을 해치는 것이다. 전면적인 금지보다 흡연 구역을 지정해 두 집단의 상반된 이익을 조절하는 것이 맞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흡연 구역을 통과해야 하는 비흡연자의 고충도 있지만, 잠시 숨을 참거나 해서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된다. 잠시의 불쾌함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예민함은 개인적인 사정이다. 성인이라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공공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사적 예민함이 공공 정책의 기준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자신이 상처받았거나 모욕당했다고 느끼는 이는 언제나 옳다’는 진정성 원칙이 오늘날 교육 현장에도 파고들면서 교육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 한 고등학생은 교사의 훈계를 듣고 “인격적 모멸감을 받았다”는 이유로 담임을 아동학대로 고소했다. 여차하면 학생인권침해로 교육청에 민원을 넣겠다며 협박하는 학생들도 있다. 수업 시간에 떠드는 학생을 나무랐다가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교사가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촉발할 우려가 있는 자료를 수업에 활용할 경우 이를 미리 고지하거나 수업에 빠질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촉발경고’는 성인인 대학생들을 미숙하고 상처입기 쉬운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징징거리는 민원인으로 만든다.

개인의 감수성을 우선하는 것은 공동체는 물론 개인의 성장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의 예민함이나 불편함이 곧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로베르트 팔머가 말했듯이, “무수한 ‘나’들을 어르고 달래는” 정체성 정치는 정작 중요한 공동체의 의제를 간과하게 만들고 구성원들의 성숙을 가로막는다. 사회를 향해 어리광을 부리는 지적 유아 상태에 머물게 하고 피해자 의식을 부추긴다. 모든 경험으로부터 안전한 교육공간에서는 지성이 깨어나지 못한다. 지성은 개인의 경험을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객관화하고, 자신의 관점과 신념이 다층적인 현실 속에서 어느 지점에 어떤 각도로 위치해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빌어먹을 ‘나’는 잠시 넣어두고 불편함이나 예민함을 감수하면서” 공론장을 회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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