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민주당 권리당원의 쓴소리

by 현현


퇴행은 일찍이 시작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이 논란이 되고 있다. 어떻게 이처럼 준비되지 않은 무자격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의아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이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이변이 아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 더해 집값 폭등과 함께 임대료가 오르고, 이어 코로나 팬데믹이 닥치면서 정부의 방역 정책에 협조하느라 폐업 위기에 몰린 수백만 자영업자들을 나몰라라 하고서도(그것도 60조가 넘는 초과세수를 끌어안고서) 정권이 넘어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 덕분에 과반이 훌쩍 넘는 의석 수를 확보한 민주당이 보여준 우유부단함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을 배가시켰다.

민주당이 허약 체질이 된 것은 2004년 탄핵 역풍이 불 때 노무현 지지세를 업고 30대 중반에 ‘묻지마 당선’ 식으로 국회에 입성한 386 출신들이 현역 의원 프리미엄으로 쉽게 재선, 3선, 4선 의원이 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횡재는 독이 되기 십상이다. 이제 586이 된 이들 운동권 정치인들은 연줄로 취업하듯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가 평생 직업인 생계형 정치인들이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 대의를 위해 몸 바쳤다는 도덕적 우월감이 있고 또 역사와 사회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고민했다는 엘리트의 교만이 있다. 한편 소장 그룹은 박근혜 탄핵 후 민주당에 180석을 몰아줄 때 얼떨결에 국회에 입성하게 된 이들이다. 바닥부터 다지면서 정치적 감각을 익힌 것이 아닐 뿐더러 생활 감각도 없다. 때문에 자영업자들의 고충을 십분 아니 십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한다.

자영업자들 못지않게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린 집단은 이삼십대 젊은 남성들이다. 2018년 12월 리얼미터 조사 결과 문 대통령에 대한 20대 여성의 지지율이 63.5%인데 반해 남성의 지지율은 29.4%에 그쳤다. 2021년 재보궐 선거에서 보수당 오세훈 후보에 대한 20대 남성의 지지율은 70%였다.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고 성평등한 문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가 보수 성향을 띠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진보를 자처하는 기성세대는 당황스러워했다.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꼰대스러운’ 상황 인식이었다. 오히려 성평등 의식이 체화된 세대가 자신들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여성 권익을 우선시하는 페미 정부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불공정에 대한 문제제기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청년 정책의 하나로 내세우는 약은 수를 썼지만 급진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청년 세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내내 젊은 남성들의 반페미니즘, 반민주당 기조를 확인했음에도 민주당과 정부는 그들을 백안시하고 오히려 성별 갈등을 조장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대선에서도 반대편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급진 페미니스트들 주장에 동조해 법치주의의 근간을 무너트리는 자칭 진보 집단의 반지성적 행태에 뜨악해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지만 정작 진보 진영은 문제의 심각성을 지금도 모르고 있다.

올 초 한겨레를 비롯한 몇몇 언론사 간부들의 뇌물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진보를 자처하는 집단의 퇴행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수년 동안 한겨레를 지켜보며 한 조직이 순식간에 이처럼 집단적으로 망가질 수 있을까 한탄했다. 때로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한겨레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불과 5~6년 사이에 집단적인 비이성에 빠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유의 감각은 점점 마비되고 그 선봉에는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를 내세운 진보라는 진영이 서 있다.”(이선옥닷컴, ‘애증의 한겨레를 떠나보내며’) 이선옥의 지적처럼 한국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반지성주의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진보 진영에서 먼저 퍼지기 시작했다.

누가 더 멍청한가


“적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패한다.” 충무공의 말이다. 좌파들이 곧잘 저지르는 실수는 우파를 멍청하다 여기고 내려다보는 것이다. 엘리트의 오만함에다 좌파 특유의 이념적 정당성과 신념이 더해지면서 빠지는 함정이다. 자타 공인 엘리트인 힐러리가 트럼프에게 패했던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프라이는 좌파가 저지르는 커다란 오류 중 하나가 적의 명석함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트럼프 일가가 좌파들이 즐겨 읽는 인문서를 읽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똑똑하지 않은 건 아니라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표에 의존하는 민주당은 그들을 가난하게 놔두면 계속 표를 얻게 된다. 슬픈 역설이다.” 트럼프의 조롱이다. 그는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찌를 줄 아는 동물적 감각을 갖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트럼프처럼 명석하지 않은 사람도 대통령이 된다. 더 멍청한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에서 법치주의의 근간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안다. 피해호소인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범죄가 성립하고 유죄 선고가 내려진다. 성범죄 재판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 죄형법정주의라는 형사법의 근본이 간단히 무시된다. 법조인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이 그 심각성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이를 방관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고백하기도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남성들이 앞다퉈 페미니즘을 옹호하며 21세기판 마녀사냥에 동참한다.

‘마녀’로 찍힌 여성들이 목숨까지 잃어야 했다면 오늘날 성범죄자로 낙인찍힌 남성들은 사회적 생명을 잃는 정도로 그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일어난다. 박원순 시장이 성희롱을 했다고 판단한 국가인권위 결정에 대해 박 시장 부인이 제기한 취소소송 1심 판결을 앞두고 정철승 변호사는 페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법관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온갖 위원회 위원 자리를 꿰차고 있는 여성계 사람들과 별별 여성단체들, 언론들이 재판부를 ‘여성인권의 걸림돌’로 비난하며 잔인한 조리돌림을 할 텐데, 어떤 판사가 죽은 정치인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경력이 망가지는 불이익을 감수하겠는가.” 그의 예견대로 박 시장 부인은 패소했다. 정 변호사는 국가인권위 최영애 위원장에 대한 직권남용 형사고소 등의 법적 조치를 병행하도록 권했지만 원고측이 받아들이지 않고 변호인 위촉을 해지했다고 한다.

국민의 개혁 열망을 저버리고 성별 갈등을 부추겨 윤석열 정권을 낳은 문재인 정부의 과오는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검찰의 공권력 남용을 방치하거나 조장하고, 스스로 법치주의 근간을 무너뜨리면서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무책임한 모습에서 두 정권은 그리 다르지 않다. 민주당 지지율이 국힘당보다도 낮은 이유다. 국민은 멍청하지 않다. 많은 이삼십대 남성들이 멍청해서 국힘당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인정하고 법치주의를 바로잡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진정한 사법 개혁의 길이자 정권을 되찾는 길일 것이다. 문제는 민주당이 그럴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상식 밖의 행태를 보이는 윤석열 정부의 삽질이 곧 있을 총선과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고 기대할지 모르지만, 여당의 실패 덕분에 야당이 정권을 잡는 슬픈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민주당은 개혁을 해낼 역량이 없음을 자인한 셈이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딜레마는 국정을 책임질 만한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도 민주당 권리당원으로서 지난 5년 동안 한 역할이라곤 전자투표 몇 번 한 것뿐이지만 민주당의 무능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면피를 위한 것은 아니다. 무능함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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