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성과 신자유주의
교육의 영역에서 학습자의 자발성, 자율성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3백여 년이 채 되지 않는다. 18세기 중반, 아동의 흥미와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억압적인 교육을 비판하며 아이들의 개성과 발달단계에 따른 교육을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루소는 아동의 본성에 기반한 자기주도적 경험을 강조하며 경험의 주체가 곧 배움의 주체이자 삶의 주체가 된다고 보았다. 자발적 경험을 중시하는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초 존 듀이에 이르러 경험주의 또는 실용주의 교육론으로 집대성된다. 학습자는 경험의 재구성을 통해 성장해가는 주체이며, 교사는 학습자가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촉진자이자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듀이는 말한다.
20세기 후반,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지식을 개인의 경험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구성주의 관점, 개성과 자율성 그리고 다양성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개인의 주도성을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자기주도성 담론은 18세기 이래 300여 년에 걸쳐 서서히 확산되어온 것으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와도 궁합이 맞았다. 개인의 판단과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옹호하는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시장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는 개개인의 자기주도성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한다. “네 생각대로 해”라며 자율적 판단에 의한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처럼 자본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율적인 인간이라 믿도록 만든다. 민주국가는 시민들의 자율적(?) 판단에 의한 선거를 토대로 한다.
자기주도성 또는 자율성은 개인의 역량이나 자질에 속하지만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띤다. 아이들의 자율성을 함양하고자 하는 교육목표를 갖고 있는 국가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율적인 시민을 기르는 것일까? 자율성과 창의성 같은 역량을 키우고자 1995년 김영삼정부가 단행한 5.31교육개혁은 1996년 OECD 가입과 세계화 전략에 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1997년에 나온 7차 교육과정은 “국가 수준의 공통성(보편성)과 지역‧학교‧개인 수준의 다양성(개별성)을 동시에 추구하며 학습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신장하기 위한 학생중심의 교육과정”을 천명하고 있다. 이 교육과정은 여러 차례 개정되었지만 현재까지 공교육의 뼈대를 이룬다.
국가 수준의 교육정책은 경제정책에 종속되기 십상이다. 수출위주 경제정책을 추진해온 한국은 세계경제 흐름에 더욱 민감한 구조여서 경제의 변화에 따라 교육의 흐름이 바뀌어왔다. 198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는 지금도 우리 사회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인의 주도적 선택을 강조하며 정부의 규제를 줄이고 시장의 자율에 맡기면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의 복지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는 우파와 좌파 정부를 가리지 않고 스며들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대세가 되는 데는 OECD라는 국제기구의 역할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서방국가의 안전보장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경제 분야 파트너로 1961년 발족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1990년대 이후 경제를 넘어 세계 각국의 교육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각국의 교육정책 수립에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OECD가 1997년부터 3년마다 실시하는 국제학생평가(PISA)는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읽기, 수학, 과학 능력을 평가하는데, 그 평가 결과와 순위는 회원국뿐만 아니라 비회원국들에서도 중요한 지표로 작용한다. 사실상 PISA를 통한 교육의 세계적 표준화가 진행 중이다. OECD는 2002년에 교육국을 설치하여 교육과 노동시장, 경제를 결합하는 작업을 꾸준히 추진해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더욱 주목받기 시작한 평생학습 담론은 유네스코(UNESCO)의 인본주의 관점에서 1990년대 이후 OECD의 인적자원개발 중심의 신자유주의 관점으로 변화해왔다. 5.31교육개혁에 이어 김대중정부 들어 교육부 명칭이 교육인적자원부로 바뀐 것 또한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역량중심교육도 다르지 않다. 창의력, 논리적 사고력, 문제해결 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역량’은 OECD가 정의하는 인간자본의 핵심 개념이다. 창의력과 사고력 같은 학습자의 역량을 높임으로써 생산성을 높이고 이는 곧 국가경쟁력을 높여 GDP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과 경제성장
역량 있는 개인이 생산성도 높고 이런 개인들이 늘어날수록 전체의 생산성도 높아질 거라는 계산은 간단한 일차방정식이다. 사회가 이처럼 간단한 방정식으로 돌아간다면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이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사회라는 복잡계는 간단히 풀 수 있는 방정식이 아니다. 빈국의 노동자를 돕고자 하는 공정무역은 가격을 왜곡시킴으로써 공급 과잉을 불러와 빈자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다. 집값을 잡고자 신도시를 개발하지만 신도시의 토지보상비가 투기자본이 되어 집값을 더욱 부추긴다. 교육에서 자율성의 강조는 곧 자율형 사립학교 문제로 연결되며 이는 학교 서열화로 이어진다. 자율화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가속시킬 가능성이 높다.
경제성장을 위해 자율성과 역량이 강조될 때 교육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교육학자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이는 경제학과도 뗄 수 없는 문제다. 모든 정책은 작용과 부작용을 동시에 가져오고 부작용은 피할 수 없는 비용이지만 그 비용을 줄일 수는 있다.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사회과학이다. 국가 수준, 세계 수준의 정책은 사회과학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싱가포르처럼 10% 상위권 학생들의 역량을 높이는 데 집중할 것인지 모든 아이들의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국가 수준 교육의 방향을 정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펼칠지를 결정하는 것이 국가정책을 추진하는 이들의 역할이다.
‘국가 수준의 공통성과 함께 지역‧학교‧개인 수준의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천명한 5.31교육개혁은 적어도 모든 아이들의 가능성을 살리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방향을 정한 것이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 정권에 따라 고교 서열화와 평준화 사이를 오락가락해온 것이 지난 30여 년간의 한국 교육이었다. 사실상 개혁다운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쟁’을 국정 운영의 기본원리로 내세우는 윤석열정부는 “교육부도 경제부처가 되어야 한다”면서 신자유주의 막차에 올라탔다. 15년 전 MB정부가 좇던 노선을 뒤좇는 셈인데, 정치와 외교에서 엇박자가 나면서 경제에서도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 수준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의 성장보다 경제의 성장이다. 자율성과 창의성이 강조되는 것은 표준화된 노동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시대에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아이들 역량을 높이는 것이 곧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경제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은가 반문할 수 있다. 여기서 ‘아이들의 성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것? 경제활동을 통해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또는 다른 사람을 위로할 줄 아는 것? 이 모두를 통틀어 공동체에 책임감을 느끼는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OECD가 중시하는 ‘역량’을 갖추면 공동체에 책임감을 느끼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까?
부모와 국가는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을 함께 책임지는 주체다. 공교육의 역할은 학생 개개인의 능력을 키울 뿐 아니라 후세대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기르는 것이다. 국가가 무상교육을 책임지는 이유다. 오늘날 각국의 헌법이 교육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국가와 부모가 아이들을 시민으로 성장시킬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모와 국가가 아이들의 성장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자녀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관점과 국가 미래를 생각하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역할을 적절히 나눠야 한다.
학습자 중심과 수요자 중심
한국처럼 공교육이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방편이 된 사회에서 자율화는 곧 학교 서열화로 이어진다. 주도성, 자발성이 개인 수준의 개념이라면 자율성은 주로 학교 차원의 개념이다. 학습자 주도성과 자발성은 학교 자율화로 나아가는 데 필수 요소다. 교육적 관점에서 자율화는 교사와 학교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인 반면 경제적 관점에서 자율화는 곧 규제 완화로 통한다. 정부의 규제를 최소화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는 교육 영역에서 다양성의 이름으로 개별 학교의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국제학교와 자율형 사립학교 같은 수요자 중심의 교육환경을 만든다. 대안학교 또한 의도치 않게 이러한 흐름에 일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맥락에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개별 학교와 학습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학교와 개인도 기업처럼 자신의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책무성의 개별화’로 어어진다. 개개인은 무한경쟁 사회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관리·경영 능력을 갖추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며, 학교는 수요자의 요구에 맞춰 서비스를 제공하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흐름을 타고 학습자 중심 원리가 수요자 중심 원리로 변하면서 아이들의 성장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교육이 서비스가 되고, 부모와 학생이 ‘고객’이 되면 교육도 배움도 가능하지 않다.
배움의 본질적 속성이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데 있다고 볼 때 ‘학습자 중심’이 과연 배움에 적합한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화폐를 지불한 만큼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등가교환 시스템은 같은 화폐 가치를 갖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며 더 나아가 거래하는 사람도 서로 대등한 존재로 만든다. 교육을 서비스로 간주하게 되면 학생이 교사와 맞먹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교육도 배움도 불가능해진다. 1998년 김대중정부 때 정부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된 행정서비스헌장 제도는 규제·절차 중심에서 고객·결과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행정에 경쟁과 경영의 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민원제일주의’가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그즈음부터다. 시민의식이 채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서 행정서비스 개념을 섣부르게 확대하면서 생겨난 부작용인 셈이다.
행정이 서비스라는 개념에는 민주주의 가치가 담겨 있지만 학습자 중심과 수요자 중심이 뒤섞이고 교육행정과 교육이 뒤섞이면 교육현장이 무너진다.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은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골라서 받는 것처럼 자기주도적인 배움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무엇을 배울지 알 수 없는 시점에, 무엇을 가르쳐줄지 알 수 없는 사람 밑에서,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을 배우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배움의 구조 속으로 들어갈 때 성장이 일어난다”는 우치다 타츠루의 말은 배움의 역설을 말해준다. 배움은 자기 한계를 넘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성숙의 과정은 탈피의 과정이다.
미성숙한 어른(?)들이 늘어나는 시대에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 교사가 아이들 뒤에 또는 곁에 서는 것이 최선일까? 입시에 유리한 과목을 골라서 학점을 따는 것이 자기주도적인 배움일까? 스스로 학점을 관리하고 스펙을 관리하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다닐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자기주도적 학습을 강조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의 실상이 경쟁을 ‘당하고’, 의사결정을 ‘당하며’ 사는 것이라면 그 자기주도성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자본과 국가가 만들어낸.(그러나 거기에 악의는 없다. 복잡계가 빚어내는 삶의 아이러니가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