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에 찬 물 따라 마시기
블로그는 초딩때부터 무언가를 쓰고 싶을 때 들어가던 장소이기 때문에 그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 같은 게 있다. 오래되고 익숙한 공간인지라 여기에서 뭔가를 쓰면 그게 결국 어딘가에 올라갈 글이든, 무서울 것 없이 쉽게 다룰만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기사를 쓸때도, 에세이를 쓸 때도, 하물며 과제를 할 때도 중간에 막히면 그대로 주욱 드래그해서 Ctrl + C , 블로그에 Ctrl + V 해 온다. 이제 워드나 한글은 좀 불편하다. 특히 한글은 문자를 치는 대로 문서화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해서 때때로 숨 막힌다. 지금도 블로그에 들어와서 이걸 쓰고 있다. 물성을 갖게 될 문장을 쓴다는 게 자꾸 마음을 답답하게 해서, 블로그라는 질리도록 익숙한 공간을 빌린다.
그렇게 익숙한 공간을 빌려서 쓰고자 하는 건 다름 아닌 일기다. 최근에 개강했고, 학교든 학교 외로 벌려둔 일이든 다 마감이 있는데 기한 직전까지 미루다 해치우는 타입이기 때문에 일주일에 몇 번의 마감을 치루는 동안 무리하게 바쁘거나, 지나치게 한가하거나 둘 중 하나다. 내가 바쁜지 안 바쁜지 잘 모르겠는 채로 항상성 없는 날들이 지나간다. 이럴 때일수록 일기를 쓰며 하루를 되짚는 일이 중요할거다.
오늘은 어느 쪽이었냐면, 무리하게 바쁜 쪽이었다. 오전에는 댄스 수업을 잡아둬서 아침 일찍 부터 땀을 잔뜩 쏟았다. 춤은 몇 주 전에 충동적으로 시작했는데, 아직 거울에 비친 내 하찮은 움직임을 마주하는 게 힘들다. 이번 주에 배우는 소미의 '벌쓰데이' 안무가 왕몸치인 내게는 너무 현란해서 수업 시간 내내 웃기는 꼴로 쩔쩔맸다. 아침에 아무것도 안 먹고 가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언제나 배가 고프면 상황이 악화되는 법이니까.
수업이 끝나고 댄스 스튜디오에 비치된 종이컵에다 정수기 찬물을 가득 담아 쭉 마셨다. 물 한 컵으로는 갈증이 다 가시지 않는다. 근데 또 두 번째로 따르면 반 정도 마시고 남은 물을 버리게 된다. 항상 그렇다. 자신이 얼마만큼의 수분을 필요로 하는지를, 그 적정량을 맞추는 걸 어려워 한다는 걸 잘 아는지 정수기 옆에 물 버리는 통이 따로 놓여있다. 사람들은 곧잘 알맞은 양을 받아서 흡수하는 일에 잘 실패하기 때문에, 남는 건 버릴 수 있도록 해둔 친절한 조치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온라인강의를 듣고, 마감시간이 지나기 전에 미뤄뒀던 일을 얼른 마무리했다. 파자마로 갈아입고 나오니 자정에 가깝고, 비는 부분 없이 가득 채운 하루다. 오늘 할일을 다 끝냈으니 내일은 또 일정이 없는데, 하루 종일 방 침대에 슬프게 누워있는 거 말고 바깥바람이라도 좀 쐬면서 생기 있게 보내고 싶다. 한가한 날은 그 전날까지 무리하게 바빴다는 사실에 대한 억울함과, 쉬어 마땅하다는 보상심리가 섞여서 그저 가만히 누워있게 된다. 그렇게 방 침대에 누워있는 채로 해가 지는 걸 볼 쯤이면 꼭 슬퍼져서, 아 정말 내 기분 맞춰주기가 어렵구나, 느낀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날에 막상 아무것도 안하고 아무랑도 안 만나면 그 비어있는 감각이 참 별로다. 그게 싫어서 춤도 배우기 시작하고 일본어 학원도 다시 등록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거절하지 않고 추가하고 일을 늘린다. 서투른 솜씨로 낯선 빈틈을 때우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매일 매일이 잘못 채운 종이컵같아져 버렸다. 오늘은 너무 많이 따라서, '남은 물은 이곳에' 통에 좀 덜어 버리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