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능 자동차의 세계가 숫자에 집중하는 것에서 벗어나 감성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긴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출력 경쟁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제조사들은 고성능 차량의 존재 가치를 소비자에게 더 깊은 주행 경험과 감성적인 만족을 제공하는 데 두고 있습니다.
‘사운드 디자인’은 고성능 차량의 대표적인 감성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를 자극하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사운드는 고성능 자동차의 필수 덕목입니다. 오늘은 드라이빙 감성을 한층 더 자극하는 특별한 소리, ‘배기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감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더욱 드라마틱한 경험 속에 놓입니다. 예를 들어 호러 영화에서 단순히 눈으로 귀신을 마주할 때보다, 서늘한 배경 음악과 효과음이 함께 했을 때 공포감이 더욱 고조되는 것처럼 말이죠. 고성능 자동차의 경험이 단순한 드라이빙에서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으로 진화하고 있는 지금, 주행 시 청각 경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운전이라는 영화에서 주행 감성을 증폭시키는 효과음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배기음’입니다. 배기음은 쉽게 말해 흡입-압축-폭발-배기로 이어지는 내연기관의 네 가지 행정 중 마지막 요소, 즉 배기가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리입니다. 엔진이 크랭크샤프트를 돌리며 내는 ‘엔진음’과는 비슷하면서도 다소 다른 개념이죠.
사실 엔진에서 갓 빠져나온 배기음은 생각보다 훨씬 우렁찹니다. 사실 소리라기보다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시끄러운데요. 우리가 실제로 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자동차 배기음은 흔히 ‘머플러’라고 일컫는 소음기를 달아 최대한 억제한 소리입니다.
그래서 제조사들은 차량의 콘셉트나 차종에 따라 배기음을 듣기 좋게 매만집니다. 가령 고급 세단이 중후하면서도 들릴 듯 말 듯한 배기음을 내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고급 세단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동차는 정숙성과 승차감을 위해 배기음을 억제하는 편입니다.
자동차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운전 재미로 승화시켜야 하는 고성능 자동차에선 이야기가 다릅니다. 배기음을 재료로 활용해 한결 풍부한 운전 재미를 만들기 때문인데요. 그렇다고 고성능 자동차의 배기음이 마냥 우렁차기만 한 건 아닙니다. 차량 콘셉트나 브랜드 특성에 맞춰 가수의 목소리 같은 적절한 ‘음색’을 만들기 위해 배기 시스템을 손보곤 하죠.
N 브랜드를 내세운 현대차도 고성능 영역에서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브랜드입니다. 현대차는 최초의 N 브랜드 모델 ‘벨로스터 N’을 내놓으며 화끈한 배기음을 선보인 바 있는데요. 현재는 ‘배기음 장인’으로 거듭난 현대차가 본격적으로 배기음의 ‘사운드 디자인’을 강조하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모델이기도 합니다.
이후 많은 기대를 받으며 등장한 N 브랜드 모델들은 중저음의 묵직한 배기음을 뽐내며 좋은 반응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능동형 가변배기 시스템’을 브랜드 최초로 선보이며 고성능 자동차에 걸맞은 재미를 선사한 건데요. 가변배기 시스템이란 머플러 내부에 밸브를 장착해 배기의 흐름을 다스리는 장치로, 전자 제어를 통해 배기음의 음색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현대 N 브랜드 모델들이 서킷에서는 거센 울음소리를 자랑하다가도, 동네 골목길에서는 낮게 그르릉 거리는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가변배기 시스템을 활용한 벨로스터 N의 후연소 사운드(After-Burn Sound)는 ‘팝콘 튀기는 소리’로도 불리며 많은 자동차 마니아들의 환호를 자아낸 바 있습니다.
점화를 지연시키는 배기 시스템 제어로 자아낸 이 팝핑 사운드는 수 년의 담금질을 거쳐 이제는 N 브랜드의 시그니처 사운드로 자리잡았습니다. 예컨대 가속하는 사이에 페달에서 발을 떼거나, 변속기의 단수를 높일 때 이 사운드를 감상할 수 있죠. 덕분에 사람들은 도로에서 팝콘 튀기는 소리가 들리면 ‘N 모델인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배기음 제어가 마냥 쉬운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자동차 관련 법규에는 소음 규제가 있거든요. 게다가 소음 기준은 국가별로 다르죠. 참고로 우리나라는 승용차 기준, 등급 분류에 따라 최저 100dB(A) 이하, 최고 105dB(A) 이하의 배기음 규제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동차 제조사들은 이런 제약 요소들을 모두 고려해 배기음을 튜닝하고 있습니다.
소음 규제가 까다로워지는 흐름에 따라 최근에는 가상 사운드 기능도 빠르게 확대 중인데요. ‘N 사운드 이퀄라이저(N Sound Equalizer)’라는 이름으로 N 브랜드 모델에 적용 중인 기술이 대표적입니다. N 사운드 이퀄라이저는 내부 스피커에 N 브랜드의 시그니처 사운드를 흘려보내 주행 감성을 극대화하는 기능인데요. 쉽게 말해 실제 배기음과 엔진음에 조미료 같은 가상 사운드를 더해 감칠맛을 증폭시킵니다.
현대차는 배기음뿐 아니라 운전자의 청각을 한층 즐겁게 만드는 기술을 연구해 왔습니다. 그리고 전동화의 흐름 속에서 보행자 안전을 위한 가상 사운드 기술을 고성능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최근 고성능 차량의 사운드 디자인은 전기차와 공존하는 내연기관의 감성을 재현함과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청각 경험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현대차의 고성능 전기차 아이오닉 5 N에 최초로 적용된 ‘N 액티브 사운드 플러스(N Active Sound Plus, 이하 NAS+)’에서 바로 차세대 사운드 디자인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요.
각각 이그니션(Ignition), 에볼루션(Evolution), 슈퍼소닉(Supersonic), 세 가지 모드를 구비한 NAS+는 고성능 자동차의 레거시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아우르고 있습니다. 우선 이그니션 모드는 벨로스터 N에서 시작된 내연기관 N의 사운드를 계승합니다. 고조되는 엔진의 회전감과 탁탁 튀는 애프터 번 사운드를 재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에볼루션 사운드는 고출력 전기차의 모터 소리를 극대화했고, 슈퍼소닉 모드에서는 제트기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사운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내연기관의 물리적 작동을 사운드로 승화시킨 배기음은 전동화 시대에도 변신을 거듭하며 소비자에게 다가갈 전망입니다. 적어도 고성능차에 있어 따분한 배기음은 자동차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요인이니까요. 이는 고성능 자동차가 여전히 감성의 영역에 놓인 소비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