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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수 Jul 04. 2020

휴가지의 이별

전주에 왔다. 남편은 2월부터 재택근무를 해왔다. 한옥을 한 채 빌려 대인접촉을 최소화하는 것 등등으로 방비를 삼았다.


목요일 밤에 도착한 한옥마을은 썰렁했다. 겨우 열려있는 밥집을 찾아 저녁을 먹고 서둘러잤다. 지난밤에 두 시간밖에 못 자서인지 한옥집에서의  잠이 달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습도와 온도도 딱 마춤하니 좋았다.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숙소가 마음에 들었다. 작은 대문과 마당, 문살과 한지, 낮은 부엌, 낡은 세간살이.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방에서 나는 익숙한 옛 집의 냄새였다. 어릴 때 할아버지 댁에 가면 나던 냄새. 양옥집으로 올리기 전 옛 시골집에서 나던 냄새. 냄새 하나 만으로 숙소는 내 오래된 할아버지 집과 마찬가지의 정겨움이 있었다.


금요일이 되자 마을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관광객의 웃음이 보였고 상인들의 발걸음이 빨랐다.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강아지와 함께 카페를 찾았다. 커피맛이 무척이나 좋아 기분은 계속 좋아지고만 있었다. 숙소에 가서 노트북과 책을 들고 와서는 카페에서 작업을 했다. 의외로 일이 빨리 끝났고, 과정도 재미있었다. 기분이 더 좋아졌다. 남편은 강아지와 산책을 가고 카페에서 혼자 여유롭게 더 일했다. 일을 마치고 숙소에 혼자 돌아왔는데, 다름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릴 때 바닷가로 놀러를 자주 갔었다. 아버지는 해군이었고 등위에 나를 태우고 깊은 바다를 수영했었다. 물결은 반짝여 눈이 부셨고 바다는 고요했다. 사람이 오지 않는 해변만 골라 우리 가족은 피서를 갔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 가끔은 사람으로 북적이던 군인 콘도. 며칠을 지내고 돌아오는 날이 되면 나는 몰래 울었다. 그 장소와 너무 깊은 정이 들어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자라고 나서 보니 그 감정은 연인과 헤어질 때의 그것과 온전히 같았다. 휴가지의 마지막 날은 늘 고통이었고 돌아와서도 향수병을 앓았다.


오늘 낮, 혼자 숙소에 돌아왔을 때 어릴 때 그 느낌이 갑자기 살아나서 온전히 나를 덮쳤다. 처음엔 당황스러워서 이게 무슨 감정이지.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이유를 몰랐다. 빈 초가집 들마루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여덟 살, 열두 살, 열일곱 살. 혼자 울던 그 바닷가에서의 감정. 그것이 찾아왔구나.


재일교포인 남편에게 장마철의 전주는 교토와 같은 곳으로 다가왔다. 내게도 비오는 전주에서 교토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우리 부부는 교토를 퍽 좋아한다. 깨끗하고 오래된 좁은 거리를 사랑한다. 그 모습도 겹쳐지니 여러 감정이 오갔다. 좋아하는 남편을 보니 나도 덩달아 더 기뻤고, 전주의 곳곳이 더 이뻤다. 시장에는 여전히 칼을 만드는 아저씨가 계셨고 순대국은 허여멀겋지 않고 빨갰다. 어릴 시절의 좋은 기억과, 돌아가기는 싫으나 가보고 싶은 일본에 대한 감정도 불러오니, 이 도시가 나를 사랑하나 봐. 드라마 대사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하루 만에? 남편이 답했다. 첫눈에 반한 거지. 사랑은 그런 거니까. 한국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외국인들이 느꼈던 기분도 이런 건지 모르겠다. 나도 일본과 그런 사랑에 빠졌다면 좋았을텐데.


담장 너머 옆집에선 산초나무를 길러 향이 타고 넘어온다. 마당에 피워 둔 동글뱅이 모기향은 외출하고 돌아올 때 골목길에 은은하게 퍼져있다. 천정의 일부가 유리인 화장실에서 키우는 화초는 습기를 머금은 풀냄새를 내고, 서까래 아래 안방에선 오래된 나무와 흙벽의 냄새가 난다. 마당에 깔아놓은 조약돌은 밟을 때마다 자그락자그락 귀여운 소리를 내고 창호지 너머 사위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끔 2단짜리 냉장고가 윙-하고 도는 소리를 내면 편안한 모나의 한숨 소리가 여백을 채운다.

 

혼자라도 다시 와야겠다. 다시 와서 잃어버렸던 열두 살의 감정을 다시 꺼내고,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에 대한 기억과 마음도 다시 꺼내봐야겠다. 아직은 부드럽고 순한 구석이 있었던, 앙칼지고 외로운 소녀를 위로해주고, 혼자 순댓국을 먹으며 향교를 산책해야지.


덧.

아마도 세 번째 전주인데. 두 번은 십여 년 전 일하러 왔을 때라 너를 전혀 알아보질 못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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