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님의 조언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 혹 고난은 선택사항.”이라 한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그에 따르는 것은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화살을 맞았다면 아픔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다음 후속조치는 하기 나름일 것이다. 맞은 화살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고통은 반복될 것이다. 문제는, 마음의 화살은 어디에 박혔는지 잘 알지 못한다는 것. 어떻게 마음에 박힌 화살을 빼낼 수 있을까.
삶이 고달팠다. 고난이었을 것이다. 무슨 옵션을 잘 못 건드렸길래 고난을 겪게 된 것일까. 흐름이 원활하지 않음을 느꼈다. 무엇보다, 하는 일이 맞는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를 찾아갔다. 머리를 식히고자 방문한 곳에서 영감이 떠 올랐다. 미국은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국가. 주변 태국 불교 사찰을 알게 되었다. 불교도는 아니지만, 명상을 통해서 불교문화를 접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큰 거리낌 없이 불교 사찰로 향하였다.
도시 중심에서 떨어진 한적하고 조용한 사찰에 도착하니 마침 한 분이 계셨다. 보통은 노란색 로브를 입고 계시는 대부분의 태국 스님들과는 다르게 갈색 혹은 적갈색에 가까운 로브를 걸치고 계셨다. 또한 언뜻 보기에 매우 젊으신 분이었다. 영어는 잘 못한다고 하셨다. 물론, 겸손이었다. 그의 의사소통 방식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어떠한 현지인보다도 뛰어났다고 느꼈다. 간략하면서도 핵심을 찌르곤 하였다. 최대한의 예의를 올리며, 고민에 대해서 공유하였다. 그러더니, 스님은 눈을 감고 조용히 집중을 하였다. 짧은 명상에 잠기신 듯해 보였다. 그러고 눈을 뜨셨다.
그리고 말했다.
“문제를 알아야, 문제를 클리어한다.”
사실, 그러고 보니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문제를 스스로 알기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들의 조언과 안내가 종종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고대 인도의 어느 날, 붓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법을 하고 있던 때였다. 한 왕 역시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는 계속해서 발을 꼼지락꼼지락 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의자 없이 땅바닥에 앉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목격하고는, 설법을 잠시 중단하고 그 왕에게 물었다.
“왜 발가락을 계속 움직이십니까?”
사실 그는 자신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지 모르고 있었다. 습관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붓다가 한 말에 스스로 발가락을 움직이고 있던 것을 자각한 왕은 바로 그 행위를 멈추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붓다가 또 말했다.
“왜 멈추십니까?”
왕이 대답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왕에게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발가락을 움직이는지 몰랐습니다. 난처하게 만드시는군요.”
그러자, 붓다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자 보거라.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알았을 때야 비로소 왕은 발가락을 멈추었다.”
문제를 아는 것은 매우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대부분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현상에 정신이 팔려, 근본적인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곤 한다. 근본적인 문제란 무엇인가, 불교식으로는 무지다. 다른 말로 하면 어리석음. 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어리석은지 모른다. 그러니, 문제가 반복되었던 것은 아니었나. 어디에 화살이 박혔는지 모르니, 화살을 뽑을 수 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었나. 화살을 뽑아 상처를 치유할 생각은 하지 않고 화살을 쏜 대상만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