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는 구루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보통은 스승 정도의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들여다 보면 그 이상 이기도 한다. 인도에서는 종종 구루를 ‘어둠 혹은 무지를 제거해 주는 자’라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구루 의 ‘구’는 어둠 혹은 무지, ‘루’는 제거하는 혹은 끝내는 등의 의미. 그래서 그런지 인도 아쉬람에서는 자신의 어둠을 혹은 무지를 제거할 기회를 종종 얻는다. 그 과정에서 잠재의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공포심이나 두려움 등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러한 그러한 내면의 그림자를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언제까지나 도망칠 수는 없다. 해결하지 못한다면 비슷한 패턴이 계속해서 지속될 것이다.
요가 지도자 과정은 인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케랄라에서 진행 예정이었다. 케랄라는 아유르베다로도 유명하다. 다양한 허브들이 서식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라 한다. 이는, 열대 기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케랄라주 말라바르 해안이 후추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한 인도 친구에 따르면, 인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신 중 하나인 원숭이 모습의 하누만이 약초 산을 통째로 옮기는 도중에 많은 약초들이 케랄라 주변에 떨어졌다고 한다.
목적지 아쉬람에 도착하기 위해, 코친에서도 버스로 약 5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트리반드럼에 도착하여 또 로컬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리고 가야 했다. 어느덧 정글같이 푸르른 곳에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20분 정도 걸어가니 그제서야 아쉬람에 도착하였다. 곧,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요가 아쉬람 리셉션 근처에 한 그림에는, 힌두교의 옴 (ॐ), 이슬람의 초승달, 기독교 십자가, 불교의 법륜 심벌이 보였다. 전통적인 요가 아쉬람이라면, 보수적일 것 같지만, 개방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함께 수행하던 고치 출신의 한 인도인이 이런 말을 하였다..
“나의 구루는 예수다.”
그의 발언은 인도의 세계관을 잘 대변하는지 모른다. 인도에서는 종교란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인도인들은 종교가 없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종교는 그들의 삶에 기본적인 토대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구루가 크리슈나가 되었든, 붓다가 되었든, 예수가 되었든, 구루 나낙이 되었든, 자신들의 구도 여정을 안내해 줄 안내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또한, 구루의 지도아래 경건한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매우 소중하고 귀한 삶의 형태로 여긴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인도에서는 구루꿀라 시스템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루꿀라란 스승과 제자가 한 공간에 함께 머물고 생활하는 교육 방식으로 이해했다. 깨달은 혹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구루와 함께 생활한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구루가 좀 더 적극적으로 제자의 허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좀 더 효과적으로 제자의 어둠 혹은 무지를 제거해 줄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수행 중, 내면의 잠재적으로 억눌린 의식이 드러나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종종, 특별히 힘든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고갈된 것 마냥 지치곤 한다. 에너지가 고갈이 된다면 다시 보충을 해주면 될 것이다. 보통 에너지 (요가 전통에서는 프라나)는 음식을 통해 채운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먹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다양한 활동 중 일부일 뿐이다. 요가와 명상은 호흡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호흡이 마음과 긴밀하게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고 여긴다. 화난 사람을 보면 호흡이 거칠어 지게 되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마음이 평온한 사람은 호흡도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편이다.
그 당시에 북부 출신의 인도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옆 침대에 머물렀으므로 자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매우 들 떠 있고 신나 보이던 대부분의 참석자들과는 다르게 그 친구는 매우 조용하고 진중해 보였다. 잠들기 전 뿐만이 아니라 종종 그 친구와 대면하여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가졌다. 프로그램이 말미에 접어 들던 어느 때, 그 친구와 외부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에너지가 고갈되어 피곤한 기색이 있었지만, 그 친구와 대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세한 몸과 마음의 변화를 느꼈다. 예전 스리랑카에서 명상 수행 중, 한 스님의 출현 후 무언가 몸에 쑥하고 들어온 그런 기분과 흡사하였다. 아마도, 힐링이라고 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친구가 의도적으로 도와주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머물던 요가 아쉬람 요가 호흡 테크닠은 비움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카팔라파티 (정뇌호흡)와 나디소다나 (교호호흡, 아눌로마 빌로마)은 숨을 내쉬는 비중이 컸다. 나디 소다나의 경우 들이마심 4초, 숨 참음 8초, 내 쉼 16초를 한 싸이클로 진행 되었다. 들이 마시는 것 보다 내쉬는 것의 비중이 컸던 것이다. 잘 비워야 잘 채운다고 한다. 채우는 것에 습관이 들었던 본인과 현대인들에게 매우 필요했던 처방이었다.
또한, 당시에 프라나 조절을 잘 하지 못하였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프라나가 고갈이 되었던 것 같지만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였다. 한 요가 티처가 그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나중에서야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