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 준비를 모두 마치고, 동남아시아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자신에게 건네준 조그마한 선물이기도 했다. 당시에 명상에 막연히 관심이 생겼다. 통찰력 있다고 여겨지는 스티브 잡스나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명상 수행자였으며, 그들의 통찰력에 명상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레, 명상에 끌렸다. 마침 동남아시아는 명상의 전통이 오랫동안 보존이 된 곳이기도 하였다. 미얀마 등지에는 2,000 여년도 더 되는 위빠사나 명상의 전통이 유지되어 왔다고 한다. 우연히, 미얀마 양곤에 위치한 한 국제 위빠사나 명상센터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명상을 10일 수행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난생처음으로 10일 명상 수행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명상센터는 공식적으로는 남방불교 전통의 수행터였으나,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명상센터에서 수행할 수 있었다. 사실, 명상은 불교의 틀에서 그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으나 매우 보편적이다. 명상에서 주로 하는 것은 고요히 앉아 숨 쉬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어떠한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관도 개입되지 않는다. 실제로, 당시에 명상센터에서는 기독교 (추정) 목사님이 계시기도 하였다. 전 세계 각지에서 어떠한 사람이든지 명상센터에서 명상수행을 할 수 있었다.
그 명상센터에서 배운 명상기법은 위빠사나 명상이다. 붓다가 보리수나무에서 깨달음을 얻기 전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서 수많은 성인들 (불교에선 아라한)을 배출시켰다고 한다. 붓다가 몸을 떠난 직후, 500명의 아라한이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위빠사나 명상은 2,600여 년의 전통으로 동남아시아 불교 국가들에게서 이어져오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도에서도 위빠사나 명상 열풍이 불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위빠사나 명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불교에서 명상은 크게는 두 접근으로 나뉘는 것으로 배웠다. 하나는 사마타 (한 포인트 집중) 명상이고 다른 하나가 위빠사나 명상이다. 사마타 명상을 통해서 집중력을 키운 후에 위빠사나 명상을 이어가는 전통도 남아있지만 머물던 센터에서는 위빠사나 중심으로만 진행되었다. 그 센터에서는 주로 한 시간 걷기 명상, 한 시간 앉음 명상으로 이어갔다. 걷기 명상을 하고 나서 앉음 명상 그리고 다시 걷기 명상을 하고 다시 앉음 명상을 하는 식이었다. 걷기 명상은 소화에 특히 좋으며 앉음 명상의 삼매를 키우는 보조 역할을 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는 붓다가 명시한 걷기 명상의 몇 가지 이익에 포함되기도 한다.
그 명상센터에 오기 전, 한 현지인을 만났는데 그가 명상에 대해 묘사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는 본인의 손바닥을 가리키며, 돋보기를 통해 태양 빛이 한 곳으로 모아지면 강렬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 말인즉, 명상의 집중력을 이야기한 것 같다. 모여진 빛은 강렬한 에너지 발생하며 대상을 태운다. 물론, 물리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하지만, 마음도 비슷할 것이다. 마음을 모아서 특정한 지점에 집중하면, 집중 대상이 된 마음의 상태 혹은 번뇌가 태워짐을 (혹은 사라짐) 비유한 것으로 이해했다.
위빠사나 명상의 핵심은 아마도 알아차림일 것이다. 이를 고대 빨리어 (붓다가 사용한 언어)에서는 sati라 한다. 우리가 아는 마인드풀니스 (mindfulness)의 원어로 고려되기도 한다. 위빠사나 명상을 하는 동안에는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알아차림이 이어져야 했다. 특히, 그 명상센터에서는 알아차림을 마음속으로 읊으며 하는 라벨링 (labeling)을 통해 알아차림을 하도록 권했다. 우선은 배가 부풀고 꺼지는 것을 '부품', '꺼짐'하면서 마음으로 읊으면서 알아차리고 그 도중에 발생하는 다양한 감각적 현상 및 정신적 현상을 모두 자연스럽게 알아차림 하였다. 간지러우면 '간지럼', '간지럼'하며 알아차리고, 졸리면 '졸림', '졸림'하며 알아차림 하였다.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그 움직이려는 의도를 의식하면서 '움직이려 함', '움직이려 함'하면서 알아차림을 이어갔다. 그리고 언제든지 배의 부품과 꺼짐의 알아차림으로 돌아갔다. 어떤 누군가는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다. 배는 집이다. 집에 항상 돌아오는 것처럼, 다른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 차림하고 나서 배의 부품과 꺼짐 (즉, 들숨 날숨의 호흡과 동시에 발생하는)으로 되돌아온다.
알아차림이란 의식의 깨어있음을 나타낸다고 느꼈다. 사실, 행위의 대부분은 의식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시스템 1 (자동적, 무의식적)과 시스템 2 (의식적)에 적용을 해 본다면, 많은 행위들은 시스템 1에 해당이 되는 것 같다. 흔히 심리학에서는 잠재의식이 95% 그리고 의식이 5% 정도라고 하며 잠재의식이 차지하는 높은 비중을 빙산의 드러나지 않는 부위에 대입하곤 한다. 위빠사나 명상이란 이러한 잠재의식적 영역을 의식적으로 늘려 나아가는 훈련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면, 습관에 의해서 하던 행위들이 조금씩 통제가 되기 시작한다. 통제의 시작은 변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습관화되고 자동화된 행위들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명상은 불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힌두교에서도 요가와 더불어 명상이 매우 중요한 수행기법 중 하나로 소개되곤 한다. 요가수트라에서 소개하는 요가의 8단계 중, 명상은 7번째의 단계로 디야나 (Dhyana)로 불리며 마지막 8번째 단계인 사마디를 구축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으로 소개되곤 한다. 기독교나 천주교 역시 그 표현은 틀리지만 묵상 등과 같은 비슷한 형태의 수행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불교의 위빠사나 명상은 어느 다른 명상 전통에서 찾아보기 힘든 혹은 찾아볼 수 없는 고유의 명상 기법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힌두교에서도 불교의 사마타 명상과 비슷한 혹은 동일한 명상기법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양초의 불꽃을 응시하는 집중 명상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힌두교에서는 위빠사나 명상과 비슷한 기법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없을 수도 있다. 위빠사나 명상이 종교적 교리나 개입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매우 보편적인 명상기법임에는 틀림없어 보였으나 그 전통은 남방불교에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위빠사나 명상 체험은 매우 신선했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신이 의식적으로 살지 못했는지를 알게 해 준 체험이기도 하였다. 위빠사나 명상을 하면서 모든 행위와 정신 현상을 면밀히 알아차림 해야 했다. 그러므로 잠재의식적으로 고요한 상태에서 마음적으로 무엇이 올라오는지 관찰할 기회를 얻게 되기도 하였다.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 의식적으로 훈련하면 할수록 몇 가지 특정한 변화가 동반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중 하나는 동시성이다. 어떠한 현상이 올라오던 알아차림을 한다. 즉 그 현상과 의식이 평행을 혹은 동시적인 타이밍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매 순간순간을 현재 순간에 살게 되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 의식의 순간에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일환으로 알람시계가 울리기 거의 0.1초 전에 혹은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위빠사나 명상을 하면 할수록 확신감이 생겼다. 이것이다. 이것이 평생 투자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구나. 같이 수행하던 한 한국인 노수행자가 하던 말이 공감이 간다.
"위빠사나 명상은 목숨을 걸고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원래는 7일만 머물기로 하였으나 3일 더 연장하여 10일 동안 수행을 하였다. 마음에는 평화로움이 가득 찼고 명료했고 과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