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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호 Nov 14. 2022

유년 시절

둔한 아이

 나는 99년도 여름에 태어났다. 그 시절은 당연히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 말대로는 내가 이것저것 자주 입에 집어넣긴 했어도 얌전한 아이였다고 한다.

 나의 자의식이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달리는 자동차 문을 열려고 하다가 혼이 난 기억이다. 내 기억에도 정말 바보 같지만, 나는 아마 달리는 자동차 문을 열면, 문이 날개가 되어 하늘을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된통 혼이 났다. 그때 억울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시점의 이미지라면,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변기통에 배변 훈련을 하던 이미지 정도나, 집 옥상에서 포크레인 모양 장난감을 몰았던 기억이 있다. 계절이 언제였는지, 어머니는 어땠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그나마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내가 포크레인을 몰면서도 이 포크레인은 원래 누구의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 포크레인이 나를 위한 포크레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내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1층에서 요를 깔고 잤다. 누나가 유치원에 가면 어머니와 나는 같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때 나는 행복했었다.

  한참을 그러고 살았다. 누나가 유치원에서 노래를 배워왔던 것이 기억난다. 누나는 내게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노래가 뭐냐고 물었다. 누나가 노래를 불러주자 나는 '노래'라는 단어를 반복하며 나름대로 노래를 불렀다. 다소 얼빠져 보이긴 해도 나는 노래가 무엇인지 이해하긴 했다. 이 전에는 2살 즘에 유모차를 타고 산책을 나갔는데 내가 워낙 덩치가 좋아서 길가던 아주머니들이 그냥 걸어 다녀도 되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건 어쩌면 나중에 들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이 시절에 나는 누나들과 어울렸다. 친누나, 사촌누나들이 친구가 돼 주었다. 나는 제멋대로 굴어서 누나들을 속상하게 만들거나 답답하게 만들곤 했다. 나는 자주 내 멋대로 굴었다. 이쯤에 햄버거를 무척 좋아해서 살이 엄청 쪘는데, 그 무게가 또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 인생에서 거의 대부분 나는 비만한 아이로 지냈다. 이 당시 내 약점은 '돼지'라는 말이었다. 누나가 자기 동생의 약점이 '돼지'라는 단어였다고 어딘가에 써놓았던 기억의 희미하게 난다. 이때부터 비난에 약한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빼 마른 우리 누나랑 이런저런 놀이들을 하면서 지내던 기억이 난다. 같이 목욕도 하고, 연극 놀이를 하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도 했다. 시골도 자주 갔다. 거기서 싹싹한 사촌 누나들과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00년대의 시골은 무척 맑았다. 당시 시골이었던 태안군은 청정한 마을이었다. 갑갑한 버스 안에서 어지럼을 느끼다 내렸을 때의 즐거움,  오줌을 참을 수 없어 다 마신 음료 통에 오줌을 쌌던 기억이 난다. 시골에 도착하면 공기 자체가 달랐다. 공기는 맑았고, 전화는 터지지 않았으며, 밤이 되면 별들이 형형했다. 낮 동안은 각종 잠자리와 벌레들이 풀숲을 쏘아 다녔다. 도시에선 적갈 빛 꼬리를 가진 잠자리들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시골에 가면 파란색, 하얀색, 검은색 잠자리가 날아다녔다. 잠자리채의 그물 틈을 벗어나던 실잠자리, 개울에서 본 개구리 알 군락, 질퍽한 갯벌에서 본 징그러운 벌레들이 기억난다.

 가장 웃긴 기억은 올챙이를 잡았던 기억이다. 사촌 누나와 나, 우리 누나는 올챙이를 잡아다가 큼직한 고무 대야에 풀어놓았다. 당시 너무 어려서 올챙이를 잡지 못하던 나는 여름 햇살에 말라죽은 지렁이들을 올챙이 먹이로 주는 일을 맡았다. 다음날, 배은망덕한 올챙이들은 개구리가 되어 고무 대야에서 달아났다. 우리는 결국 올챙이가 개구리로 우화 하는 과정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보통 시골에 가는 일을 딱히 즐기진 않았다. 허구한 날 집에 가고 싶다고, 지루하다고 투정을 부려서 이모들과 할머니를 짜증 나게 했을 뿐이었다. 시골 밥이 입맛에 맞지 않는 것도 큰 문제였다. 초등학생 정도 되고 나서는 한동안 강된장에 밥을 말아먹었는데, 그 전엔 도대체 뭘 먹고살았는지 모르겠다. 시골에서 어른들이 먹던 게장은 기묘하고 역겹게만 느껴졌다.

  어린 시절엔 날렵한 외삼촌을 동경했다. 밤새 커다란 꽃게들을 잡아왔던 것이나, 나무를 기어올라 감을 딸 수 있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물론 이 때는 외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었다. 시골에서 만나던 먼 사촌들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싸움을 좋아하던 외삼촌의 아들들과 나는 친해지고 싶었다. 나도 여자들 말고 남자들이랑도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친 남자애들과 지내려니, 힘이 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싸움이나 프로레슬링, 거친 놀림도 영 따라가기 어려웠다. 나는 그래서 이 형들처럼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부족한 남성성에 대한 체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이집에 입학하고 무얼 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유치원 시절 동안 나는 비대한 덩치 덕분에 존중받는 아이였다. 나는 아이들이 왜 나를 좋아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묘한 고양감 속에서 살았다. 나는 누구에게나 쉽게 말할 자신이 있는 아이였고, 창의적이다, 장군감이다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물론 나는 덩치만 컸지 속은 유한 아이였다. 기억나는 일도 많다. 매달 가던 수족관, 놀이공원, 박물관, 체험장 등등... 나는 여기저기 갈 곳이 많았다.

  가족들끼리 넷이서 어디론가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면 가족들이 옥신각신 거리는 것도 일종의 행복이었다. 힘들게 운전을 하거나 가족들에게 끌려다니는 아버지는 이럴 거면 가지 말지 그러냐고 툴툴대는 경우가 잦았다. 어느 체험 활동에서는 오줌싸개 인형을 만드는 활동을 했는데, 그날 이 인형의 원리가 무엇일지 물어보기에 대충 정답을 찍어 맞췄다. 그래서 어떻게 정답을 알았냐고 사회자가 묻기에 감으로 알았다고 대꾸해서 엄마가 좋아했던 기억도 난다.

  모든 체험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덩치만 큰 겁쟁이에 울보였던 과학 테마파크에서 멈춰버린 적도 있다. 인체 탐구 테마파크의 문이 커다란 입 모양이었는데, 나는 그 입 안으로 들어가기 무서워 거기에 멈춰서 울었다. 엄마는 나를 두고 누나랑 그 안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누나가 돌아올 때까지 울기만 했던 기억도 난다. 한 번은 집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집에 없었는지 문이 잠겨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가족들이 올 때까지 울었다. 우는 소리가 워낙 우렁찼기 때문에, 호랑이가 우는 소리인 줄 알았다고 옆집 할머니가 장난스레 말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운 것도 6살 즈음이었다. 상세히 설명하진 않겠다. 나는 다친 어머니가 신기해서 뭣도 모르고 흐르는 피를, 어머니의 표정을 관찰하던 것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이때 원래 아버지와 따로 살 생각이라고 나중에 밝히셨다.

 나는 자주 싫증을 냈다. 잘하던 일, 좋아하던 일을 잘하다가도 금방 질려 그만두는 일이 잦았다.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한 구석이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지 자기표현을 무척 싫어했다. 나는 7살 전까지만 해도 그림을 그리는 일을 무척 싫어했다.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원래는 무언가 만들어서 표현하는 일을 즐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누나가 9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나도 누나를 따라 이것저것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장래희망은 만화가로 정해졌다.

  이쯤에 나는 크고 작은 병에 걸렸다. 수두에 걸려서 얼굴에 흉터가 남은 것도 기억나고, 몸이 아파 토를 했던 기억, 고추가 퉁퉁 부었던 기억도 난다. 엄마는 내 얼굴에 남은 수두의 흔적을 무척 싫어하셨다. 나중에 덧니가 났을 때도 싫어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유치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재롱잔치도 잊을 수 없다. 충동적으로 흥부와 놀부의 까치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가 변덕이 생겨 선생님을 찾아가 하기 싫다고 징징거렸던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그걸 납득하고 마땅히 박 씨를 전해주는 까치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어릿광대처럼 입고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 무척 창피했다. 그런데, 옆에서 사람들의 시선과 호응을 즐기던 여자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때 내가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접받던 유치원에서와는 다르게, 초등학교에서 나는 겉도는 아이였다. 나는 내가 겉돌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말이다. 1학년 때는 뭘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 허구한 날 다투었던 것도 기억나고, 가끔 선생님을 실수로 '엄마'라고 불렀던 기억도 난다. 당시 수업은 스크린에 교과서를 띄워 진행되었다. 2학년쯤에는 내가 미술을 싫어하는 버릇이 있어서 선생님에게 이끌려 상담을 받으러 갔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참 오만한 생각이지만, 당시 나는 내가 너무 그림을 잘 그려서 진지하게 그리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나도 만족하고 친구들도 만족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그리지 않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님이 나를 이상하게 여겼던 기억도 난다. 이 때도 여전히 자신을 표현하는 일을 무척 어렵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 자신감에 치명타를 입힌 것은 태권도 학원이었다. 당시 초등학교는 태권도 열풍이었고, 몸을 쓰는 일을 좋아라 하는 나도 자연스레 태권도 학원에 등록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몸을 무척이나 어설프게 쓴다는 걸 아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자연스레 하는 일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무척 괴로웠다. 앞구르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를 드러내 놓고 비웃은 아이는 없었지만,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을 어려워한다는 생각이 나를 위축시켰다. 이때부터 아이들의 이목을 끌던 덩치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됐다. 나는 몸을 쓰는 일이 무척 창피했다.

 3학년이 되자 급식실을 재건하느라 한동안 미묘한 도시락을 받아먹었다. 이 나이 즈음에 초등학생 때 최고의 친구가 되어준 아이를 자주 만나 놀았다. 우리 부모님과 그 아이의 부모님이 상당히 친해서 매일같이 만나 놀았다. 누나는 이 친구를 너무 잘난 척한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 번은 이 친구가 누나와 크게 다투었는데, 화가 난 걔네 누나가 펜치를 들고 와서 옷을 찢어 벗기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누나의 말을 무지 안 들어서 화가 난 우리 누나가 나를 빗자루로 때리려고 했던 적도 있긴 했지만 우리 집안싸움이 정말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다지 인기 있는 아이로 지내진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메이플스토리를 했던 기억도 난다. 관공서에서 가르치는 한자 수업을 듣기도 했다. 이때쯤에 학원에도 다니기 시작했는데 내가 다니던 학원에서 남자애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다가 결국엔 나만 남게 됐다. 여자 애들은 대놓고 나를 놀렸고, 내 앞에서 서로 귓속말을 하면서 키득거리던 모습을 잊을 순 없다. 나는 내가 따돌림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굳이 따돌렸다고 말하긴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간은 단연 체육이었다.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생각에 나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길 피했다. 공놀이나 달리기는 내가 얼마나 열등했는지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날은 운동회였다. 열심히 뛰어도 꼴찌 신세인 것도 속상했지만, 내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1등이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2등을 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잘해야만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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