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동안 나는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몰랐다. 4학년쯤 되었을 때, 막연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용감하게 옥상 난간에 기어오르는 짓은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 시절의 기억은 단조롭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외로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어린이 특유의 긍정을 아주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찰 수록 우울해지는 시간들이 늘었다.
어느 날, 나중에 생길 나의 아이에게 어떤 이름이 필요할지 상상하며 길을 걸었다. 문득 내게 자식이 생겨도 사랑할 확신이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11살이 되자 학원에서의 소외는 극에 달했다. 나는 나를 바라보며 속삭이는 여자애들의 귓속말을 견디지 못해 결국엔 학원을 그만뒀다. 한동안 쉬면서 지냈다. 유일하게 친했던 친구도 5학년이 되기 전에 전학을 갔다. 누나와의 연극 놀이는 곧 누나가 중학생이 되면서 나이에 맞지 않는 놀이가 되어갔다. 그래도 11살 때, 학교에서 누나와 마주쳤을 때의 반가움은 기억난다.
어쩐지 이 시기에는 여자애들이 많이 기억난다. 한 번은 내가 짝꿍이 되자 울던 여자애도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왜 우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커서 생각해보니 뚱뚱하고 못생긴 내 옆에 앉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당시 내 몸무게는 거의 매년 10kg씩 불었다. 13살이 되기 전에 100kg가 넘을까 봐 엄마는 늘 걱정하셨다. 나는 이맘때에 사촌동생이 나보다 글씨를 잘 쓰는 거 같다고 말했다가 엄마에게 혼이 났다. 왜 자신을 그리도 깎아내리냐는 것이었다. 그게 왜 나쁜지, 혼날 이유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자신감 없이 뚱뚱한 자신을 스스로 비웃어서, 혹은 눈치 없이 굴어서 엄마는 나를 자주 매질해야 하셨다.
아직도 대나무 매에 얻어맞기 직전, 바들바들 떨리던 종아리와 처형대에 선 듯한 공포는 기억한다. 나는 그래도 매질에 대항한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매를 슬쩍 버리거나 그럴듯한 핑계를 대지도 않았다.
나는 점차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갔다. 남자애들 사이에선 겉돌았고 여자애들은 나를 쉽게 미워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나를 종종 매질하시는 어머니를 제외하곤 없었다. 이무렵 여자애들이 나보고 돼지라고 모욕했던 것도 기억나고, 그래 놓고 언젠가 내가 욕을 얻어먹자 나를 두둔해주던 것도 기억난다. 이때부터 여자의 마음은 참 알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자애들과 나쁜 기억만 있지는 않다. 여자애가 우리 집을 찾아와 함께 메이플 딱지를 구경했던 기억도 있다. 나는 늘 딱지를 잃으면서도 계속했는데, 결국 이러다 보니 초등학생들 딱지판에 새 딱지를 공급하는 사람은 내가 되어갔다.
나는 놀이에 소질도 없고, 운동도, 공부도 잘하지 않았다. 내가 잘하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이것만큼은 모두가 인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악한 표절의 집합체인 만화였지만 칸을 그리고 그 안을 인물과 배경, 말풍선으로 채우는 일만 해도 즐거웠다.
씁쓸한 사건들도 자주 일어났다. 어느 날 내가 아버지와 고기를 구워 먹는데 다른 가족들처럼 어디론가 놀러 가자고 아버지께 조른 적이 있다. 아버지는 타인과 비교당하자 울컥해서 불같이 화를 내셨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투는 동안 밥에 눈물을 뚝뚝 흘리던 누나, 화가 나서 고기도 굽다 말고 뛰쳐나간 아버지가 기억난다. 나는 종일 자책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엄마가 저녁에 익다만 고기를 구워주셨다.
나는 이맘때 너무 쉽게 믿고, 너무 자주 울었다. 사소한 거짓말에 울었고, 기가 죽어 시무룩해 있을 때가 잦았다. 엄마는 내 이런 면을 싫어하셨다. 나는 내 우울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내 몸을 미워했다. 뚱뚱하고 둔한 몸이 나는 싫었다. 나는 내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는 까닭을 몸 탓으로 돌렸다.
다른 학원에 다니면서 한동안 영어에 흥미를 붙여 지냈다. 그러나 천천히 나를 괜찮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다가 결국 또 소외되고 말았다. 나는 대놓고 놀림거리가 됐다. 친구들이 등을 돌리면서 남은 애들에게 집착하는 내 모습을 보기가 괴로웠다.
한 때는 살을 빼보려고 신축 아파트 단지를 엄마와 같이 돌아다니던 적도 있다. 그마저도 맘대로 되지 않자 금방 포기했다.
학원에서는 나보다 더 이목이 끌리는 애들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늘 따돌림당하거나 소외되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게 시작하는데, 왜 시간이 지나면 내 편은 누구도 남지 않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학교에서는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순수한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일은 나쁘지 않았고, 다소 인기 없는 친구들과 친해지는 일도 즐거웠다.
4학년쯤에 축구부 애한테 모욕을 당한 적이 있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던 일은 아니었는데, 하필 엄마가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엄마는 학교에 가서 그 녀석을 혼내주려고 했지만 내가 뜯어말렸다. 내가 당하는 취급을 어머니에게 들켰다는 것이 창피했다. 어머니에게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자기 자신에게 미안하단 생각은 하지 못했다.
덩치가 크다 보니 이런저런 시비에 걸리는 경우도 잦았다. 학교에서 한 주먹 한다는 애들이 곧잘 나를 건드렸다. 싸움 직전까지 간 적은 많지만 실제로 싸운 적은 다행히 없었다. 나는 내가 몸싸움을 무지 못한다는 걸 들키기 싫었는데, 이는 정말 행운이었다.
5학년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인기 없는 친구들끼리 어울리는 시간이 늘었다. 나는 이제까지 내가 친구가 없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지냈다. 인기 있는 친구들과도 어울리곤 했는데 약간 겉도는 느낌은 있었다.
큰 변화라면 핸드폰으로 어쩌다가 검열되지 않은 음란물을 접하고 성에 눈을 떴다는 점이 있다. 그전까지는 자신에게 음모가 나는 줄도 몰랐었다.
이맘때 미술 시간에 종이에 색을 칠해 나만의 신발을 만들기로 했는데, 나는 여기서 짚신을 만들었다. 스스로가 무척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물론 이것을 좋아해 주는 친구들은 얼마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랑 조금이나마 가깝던 친구들은 수학여행에 가면 싸움이 붙거나 일방적으로 배척당했다. 나는 딱히 미움을 사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왜 그렇게 싫어하는 애들이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번은 따돌림당하는 아이랑 같이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그 아이가 무단횡단을 하자고 했다. 나는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 아이는 죽을 준비가 됐다고 말했는데 어쩌면 소외와 배척에 지쳐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사람을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아이였고, 사람에게 악의가 거의 없는 천성을 타고났었다. 이러다 보니 입지가 애매한 친구들이랑 자주 친해진 것 같다.
6학년은 잊을 수 없다. 모호하던 초등학생 시절 중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 반에는 재미있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고, 뭣보다, 축구부에서 힘 좀 쓰는 친구 둘이 있었다. 처음엔 그 친구들과도 적당히 잘 지냈다. 딱히 이 친구가 무섭다거나 거리를 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조가 되어 열심히 점수를 따 선생님 집에서 짜장면을 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우리 반에서 똑똑하고 재미있는 친구를 괴롭혀 시험 정답을 자신에게 일러줄 것을 강요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친구는 허약한 아이를 자기 종처럼 부렸고, 시험에서 자기가 푼 문제가 틀리자 겁을 주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 애는 주먹도 종종 휘둘렀다. 덩치가 크고 나처럼 어벙한 친구가 또 있었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서 돌아온 적이 있다. 이것도 그 녀석의 짓이었다.
나는 솔직히 이때까지도 이 아이에게 실망하진 않았다. 내가 이 녀석과 거리를 두기로 한 사건은 이러했다. 반장 선거에서 암묵적으로 자신을 뽑을 것을 강요해서 반장 자리를 얻어 놓고 막상 반장이 되자 무책임하게 굴어 나를 실망시켰다. 그 외에도 옳은 말을 하거나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애들은 주먹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선생님도 무책임하긴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따돌림을 해결할 방도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피해자들을 괴롭히는데 일조했다. 축구부의 횡포는 콕 집어 말하는 일이 없었고, 상황을 고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운 좋게 얻어맞는 일이 없었지만, 내내 그 아이의 폭정을 바라보느라 힘이 겨웠다. 6학년이 끝나고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이 때도 따돌림만 당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나마 가깝던 나와 신세가 다르지 않은 친구 둘과 중학교를 같이 입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