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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호 Feb 16. 2023

악령 독후감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읽고

 고생한 끝에 악령을 독파했다! 워낙 중간에 흥미를 잃었을 때가 많아서 그런지, 읽는데 거의 2달 이상 소모한 거 같다.

 여러모로 어렵다기보단 피곤한 소설이었다. 물론 단순히 피곤한 소설에 그쳤다면 이렇게 리뷰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악령은 상당히 흥미로운 이미지로 가득 찬 영험한 소설이었다.


-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과 악령

 도스토옙스키는 극우 슬라브 주의자로써, 메시아가 다시 강림할 장소가 자신의 조국 러시아라고 믿는 독실한 사상가였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한 전향 사건을 토대로 두고 있다. 전향 사건은 워낙 유명함으로 딱히 설명하진 않겠다.

 어찌됐든, 도스토옙스키는 극좌 허무주의, 자유주의 세력에서 극렬 보수파 슬라브주의자로 개종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이러한 파격적인 '개종'은 그의 세계관에도 거대한 변화를 몰고 왔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전에 몸담았던 자유주의 세력을 비난했으며, 무신론과 허무주의를 경계할 것을 암시하는 소설을 여럿 남겼다. 그 중 가장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소설이 바로 악령이다.


 악령은 대단히 복잡한 정치 소설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비밀결사 조직 '우리 편'은 무신론, 허무주의 세력으로, 혼란을 일으켜 자신들의 정부를 조직하려는 음모를 품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악령을 통해 좌파의 끝에는 파멸과 혼란만이 존재하리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소설 악령이 위대한 정치소설인 까닭은, 입체적이고 고뇌하는 여러 모습의 허무주의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미지는 훗날 20세기 소설가들에게 여러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 등장인물들

 우리 편의 주력 인물은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타브로긴, 알렉세이 닐리치 키릴로프, 표트르 스테파노비치 베르호반스키, 그리고 이젠 탈당한 샤토프가 있다.


 우선 샤토프부터 설명해야겠다. 샤토프는 다분 도스토옙스키 본인을 닮은 인물이다. 원래 우리 편 일당이었던 샤토프는 탈당하고 무신론을 비판하는 슬라브주의자로 전향한다.

 그는 무신론에서 벗어나 삶을 살기 위해, 다분히 실질적인 이유로 전향했다. 그래서 그는 신을 온전히 믿지 못하며, '언젠가 신을 믿게 될 거라고' 말한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본인의 고뇌가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 샤토프는 살기 위해 전향했고, 아직도 신을 의심하면서 믿으려고 애쓴다.


 이러한 샤토프는 자신의 남의 아이를 잉태한 아내 마리아 샤토바가 돌아오면서,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삶의 신비로운 기적을 마주한다. 그가 이러한 행복, 어쩌면 대단히 불행한 상황에서 그는 행복을 발견한다.

 이는 그가 사상을 펼치기보단, 삶을 살려고 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행복이었지 않나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물론 이 소설은 파국으로 치닫는 '피카레스크' 소설이기 때문에, 마침내 행복과 삶을 만난 샤토프는 표트르의 간악한 정치에 휘말려 살해 당한다.


 표트르는 대단히 옹졸하고 선동을 일삼는 인물로,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이용하는 인물이다.

 사실, 읽으면서도 이 인물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아 단죄받길 기대했지만, 결말에 이르러 이야기에서 슬쩍 빠져버리는 걸 보고 당황했다. 표트르는 유난히 사실적인 인물이기도 한데, 권력을 얻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는 현실의 사람들과 어쩐지 닮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표트르는 권력을 긁어모으는 것 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인지, 후술할 키릴로프의 사상이나, 니콜라이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표트르가 샤토프를 살해한 이유도 대단히 어이없는데, 일전에 해외에서 활동할 때, 샤토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기 때문에 그를 밀고자로 몰아 살해한다. 그는 또한 니콜라이를 두려워하기보단 이용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로, 자신의 정치에 있어서 니콜라이가 '우리 편과 허무주의의 전설' 역할을 맡아주길 기대한다. 그는 니콜라이의 무한한 힘과 의지를 하찮은 정치질에 사용하려는 소인배이기도 하다.

 그는 전적으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 때문에 그들을 이용할 생각을 할뿐,함께 사상을 나누거나 고뇌하는 캐릭터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이어서 키릴로프는 등장할 때마다 소설에 집중하게 만드는 명품 조연이었다. 그가 이런 흥미로운 인물이 된 까닭은 그가 가진 사상 때문이다.

 키릴로프는 자유의지의 증명을 위해 자살하고자 한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만 자살했는데, 자신은 강요된 삶을 극복하기 위해,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자살하고자 한다. 만일 이 사상이 가능하다면, 공포를 극복하고 자유를 증명한 이는 물리적 형태가 변화하는 '승천'을 맞이하리라고 키릴로프는 열렬히 믿고 있다.


 키릴로프의 사상은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자유의 끝이 자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인간으로써의 한계를 뛰어넘어, 초인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독실한 무신론자이다.

 그를 흥미로운 인물로 만드는 설정은 더 있다. 그는 오직 사상의 증명만을 위해 자살하기 때문에, 삶 자체를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삶 자체는 사랑한다. 이 점이 대단히 특이한 부분이다.

 키릴로프는 유난히 인간적인 부분이 강조되는 인물로, 아기와 공놀이를 하거나, 샤토프를 죽인 표트르를 증오하거나, 아이를 출산하는 마리아 샤토바를 도우려고 하는 둥 여러모로 정직하고 선량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극의 후반에 이르러 그는 '샤토프를 죽인 이는 다름이 아닌 키릴로프' 라는 알리바이 생성을 위해 표트르에게 자살할 것을 요구 받는다. 그는 샤토프를 죽인 표트르에게 증오를 품다가, 그의 사상을 표트르가 어느 정도 이해하는 걸 보면서, 확신을 얻는다. 자신의 사상이 말이 된다고 믿은 그는 방 안에서 홀로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 때 그는 총을 쏘지 않고도 일종의 승천을 경험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총을 쏘기도 전에 그 자신이 사상을 견디지 못하고 승화돼버렸다는 것이다. 의심하던 표트르가 방 안을 들어가보자, 키릴로프는 어디에도 없다. 그가 정말 승천한 것인지 기대를 품을 때 쯤, 표트르는 장롱 안에 기괴하게 틀어박힌 그를 발견한다. 그는 여기에서 완전히 붕괴되버린 것이다. 육신만 남기고 정신은 승천해버린 키릴로프는 미쳐 날뛰다가 자살한다.


 그의 사상이 실패한 까닭은 자명하다. 그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을 추구했고, 그래서 그는 실패했다. 어찌보면 키릴로프는 사상의 한계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각을 하는 동물이기 전에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것을 망각한 키릴로프는 신의 경지에 이르긴 커녕 참혹한 시신으로 남는다.


 마지막 인물은 역시 악령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니콜라이다. 니콜라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초인으로, 자신을 완벽하게 지배할 뿐더러,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일종의 '메시아' 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가 온전히 자신을 소모할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의지가 쓸모 있는 곳을 찾아 더러운 일, 선한 일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찾아다닌다.


 거기에 걸맞는 자리가 어쩌면 리자와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니콜라이는 사랑에 실패한다. 그는 자신을 소모할 곳을 발견하지 못해 티혼을 찾아가기도, 자신의 죄를 사람들에게 공표할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는 인정하진 않았지만, 명백한 참회록을 작성하여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장난으로 죽은 소녀의 형상을 계속해서 마주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도 양심이 있고, 그러한 문제에 '스스로' 얽매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이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데, 어차피 인간은 신의 선(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계획을 본 사람들의 비웃음 앞에서 멈춘다. 솔직히 '3권 9장 티혼의 암자에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비웃음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아니면 무엇이 그를 정지시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의 이런 추한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스스로를 비웃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니콜라이는 자신의 순전한 의지로 자살한다. 그는 대단히 인간적으로 고통을 피해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겐 세상 모든 것이 쉽고 하찮았기 때문에 끝내 자신의 과잉을 처리하지 못하고 자결한다.


 니콜라이는 전지전능한 인간 모습의 악마도, 인간 모습의 신도 아니다. 그는 엄연히 인간으로써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는 흔히 허무주의의 정수로 생각되는데, 그 전에 니콜라이는 인간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니콜라이는 그 틀을 극복하려고 온갖 시도를 벌이지만,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여기에서 도스토옙스키가 하고 싶은 말은 어쩌면 신이 만든 선을 회피하는 무신론의 최후를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니콜라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재독을 통해서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감상

 여러모로 읽기 피곤한 소설이었다. 그래도 그만큼 재미있었다고는 확신한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이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이 소설의 결론은 '생각보다 삶이 앞선다는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도스토옙스키는 임종을 앞둔 스테판 베르호반스키의 입을 빌려, '존재에 앞서 행복과 삶이 존재해야한다'고 미약하게나마 소리치고 있다.


 악령 내내 무신론과 치고받은 도스토옙스키가 답을 찾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집필했다는 것이 놀랍다. 어쩌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의 일대기는 무신론과 악령을 반박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두 책 모두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이 소설 뒤에서 벌어지는 온갖 암투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 있다. 해석을 보면서 샤토바의 아이가 니콜라이의 아들일 것이라는 암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이 소설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의 완성도가 다소 낮다는 평가도 보여서 과연 그럴지 걱정했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역시 썩어도 준치였다. 3권 8장에서 모든 일이 급하게 마무리되지만, 3권 9장 '티혼의 암자에서' 를 읽고 나면 니콜라이가 죽음을 맞이한 까닭을 이해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됐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 급전개다. 혹은 너무 마무리가 허술하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다만 비겁한 표트르가 응징당하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해석을 읽어보니 그럴 필요조차 없이 소설에서 열외되는 '미학적인 죽음' 이라는데... 잘 와닿지는 않는다.


 악령의 악명이 워낙 드높았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지만, 못 읽을 수준은 아니다. 다만 읽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걸 참고도 볼만한 장면은 차고 넘치니, 여러분들도 악령에 도전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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