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지망생으로서, 필자는 감동이 없는 글, 즉, 아무런 충격도 없는 글은 재미있지 않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충격이란 단순히 파격적인 전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글쓰기란, 그동안 따라오던 서술자의 시점을 깨부수는 글쓰기다.
그렇다면 무엇이 서술자의 시점을 파괴하는 글쓰기인가? 그것은 상술했듯이, 소설이 조명하는 '카메라'의 시점 변화다. 사실, 소설도 영화나 만화처럼 감독, 저자의 시점의 움직임에 지배받는다. 카메라는 때로는 현란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피조물을 촬영하여 강약을 조절한다.
소설에서 카메라의 이동은 곧 저자의 시점의 이동이다. 또한 영화나 만화와는 다르게, 소설은 독자가 작가 한 명의 시점만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 집중도가 남다르며, 독서 내내 저자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공급받는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갑작스러운 제2의 카메라의 등장, 새로운 시점의 등장을 독자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며, 나아가 글에 몰두하게 된다. 소설의 몰입도는 사실상 카메라 간의 세대교체에 달려있다. 그간 줄거리를 설명하고 동고동락하던 카메라의 파괴는 독자에게 충격으로 다가오며, 필자는 글쓰기의 파괴 전략이 독자를 사로잡는 하나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몰입되는 소설이란 쉬지 않고 몰아치는 이야기이다. 대표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쉬지 않고 내달리는 줄거리와 카리스마 있는 등장인물들의 서사로 책을 내려놓기 어렵게 만든다. 도스토옙스키의 책이 흔히 대단히 말초적이고 '재미있는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카메라의 파괴를 통한 충격을 이용하는 작가의 예시로는 후기작의 톨스토이가 있다. 그의 단편작인 '하지 무라트'에서 주인공인 하지 무라트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카메라 간의 교체가 정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동안 서술자와 일체화됐던 하지 무라트가 3인칭의 시점으로 사지를 펴고 대자로 쓰러지는 장면에서 독자는 기묘한 충격을 받아 그 이미지를 오래도록 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명료하다. 그간 독자와 함께했던 카메라, 주인공 하지 무라트가 문자 그대로 파괴되고, 제2의 카메라가 침입하여 그의 죽음을 냉정한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로써 그의 죽음이 대단히 이질적이고 충격적 이도록 연출한 것이다.
이렇게 소설의 연출은 시점과 서술자 간의 교체에서 몰입도의 차이가 나타난다. 뛰어난 작가일수록 시점의 변화와 파괴를 통해 이야기를 죄어가는 능력이 뛰어나다.
독자를 압도하고 이야기에 굴복시키는 것이 작가의 일이기 때문에, 소설가는 성실하고 잔인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정들었던 화자의 시각을 중요한 장면에서 파괴하고, 독자를 뒤흔드는 것이 바로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러한 '충격과 파괴' 전술을 핵심으로 삼는 필자 또한 소설에서 최소한의 복선을 던져놓고, 집중이 필요한 장면에선 주저 없이 사건을 폭발시킨다. 혹은 우선 폭파하고 무엇이 복선이었는지 상기시킨다.
물론 최소한의 복선이란 관점에 따라 다르며, 복선의 섬세함과 일어날 사건의 계획된 일관성에 따라 충격의 크기는 달라진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충격과 파괴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들 대부분이 카메라 하나만을 가지고 소설을 끝까지 이어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몰입을 위한 시점의 파괴는 때에 따라 유용한 전략이 될 수 있다.
물론 충격을 뒷받침할 복선의 완성도가 떨어지면, 충격과 파괴 전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이러한 글쓰기 전술은 독자를 피로하게 만들기 때문에, 지나치게 남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필요할 때는 복선만 던지고 은근히 전개를 늦춰서 갈등의 폭발을 더욱 키우는 전략도 생각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