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노 아와레(物の哀れ)

벚꽃

by 김희곤

사물의 덧없음에서 오는 감동이라는 이 말은, 실은 슬픔의 미학이라기보다 인식의 전환에 가깝다. 오래 남는 것, 굳건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던 눈길이 어느 순간 방향을 바꾼다.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니라,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건드린다는 깨달음이다. 후대에 하나의 미학 개념으로 정식화되었지만, 그 정조(情調)는 이미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문학 세계에서 짙게 피어 있었다. 사랑은 이루어져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스쳐 가기에 아프고, 만남은 지속되어서 귀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끝날 것을 알기에 더 깊어진다.


벚꽃이 아름다운 것은 만개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막 피었을 때보다 오히려 바람 한 줄기에 흩날릴 때 우리의 마음은 더 크게 흔들린다. 꽃잎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우리는 비로소 꽃의 시간을 본다. 저녁도 마찬가지다. 한낮의 빛은 사물을 또렷하게 드러내지만, 해가 기울 무렵의 어스름은 사물에 깊이를 부여한다. 빛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세계는 오히려 더 조용하고 선명한 정조를 띤다. 저녁이 저무는 것이 고요한 까닭은 어둠이 와서 슬퍼서가 아니다. 끝이 가까워질 때 비로소 존재의 결이 만져진다는 뜻이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살 때보다, 그것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더 절실해진다. 사랑도 늘 곁에 있을 때보다, 문득 잃을 수 있음을 예감할 때 더 아프고 더 아름답다. 그러므로 모노노 아와레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니 덧없다고 체념하는 태도가 아니라, 사라짐을 알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더 깊게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다. 덧없음은 아름다움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이 미학이 오래 남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붙들고 싶어 한다. 젊음도, 사랑도, 계절도, 한때의 빛도 모두 멈추게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계는 붙잡히지 않는다. 꽃은 지고, 날은 저물고, 사람은 떠나고, 기억은 희미해진다. 모노노 아와레는 바로 그 불가피한 소멸 앞에서 무너지는 대신, 그 소멸 자체를 감동의 근거로 바꾸어 버린다. 사라짐을 패배로만 보지 않고, 존재가 가장 아름답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완성의 순간보다 소멸의 문턱에서 더 자주 빛난다. 다 피기 전의 꽃보다 지기 시작하는 꽃이, 한낮보다 저녁이, 영원한 약속보다 잠시 머문 눈빛이 더 오래 가슴에 남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결국 모노노 아와레란 사물의 슬픔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라지는 세계를 향해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섬세한 공감의 형식이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순간 환하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