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묻는 일, 삶을 책임지는 일

종활(終活)

by 김희곤

잘 사는 법을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잘 죽는 법을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드물다. 이 불균형은 단순한 심리적 회피가 아니다. 문명이 오랫동안 죽음을 금기(禁忌)로 다루어 온 방식, 근대 의학이 죽음을 치료의 실패로 규정해 온 관습이 겹쳐 만들어낸 구조적 침묵이다. 그러나 침묵이 죽음을 막지는 못한다. 외면할수록 마지막 순간은 남의 손에 맡겨지고, 본인의 뜻은 흐려진다.


일본에서 시작된 종활(終活)이 빠르게 일상의 언어가 된 것은 이 구조적 침묵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다. 초고령사회의 현실, 고독사(孤獨死)의 증가, 대재해의 충격은 죽음을 더 이상 먼 미래의 추상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장례와 묘지의 문제를 넘어, 의료 결정과 재산 정리, 인간관계의 마무리까지 삶의 끝을 스스로 준비하려는 움직임이 하나의 생활문화가 되었다. 죽음을 불길한 금기가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마주할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사소하지 않다. 죽음에 대한 태도가 바뀌면 삶에 대한 태도도 바뀐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죽음은 준비할 수는 있어도 통제할 수는 없다. 사람은 연명치료(延命治療) 여부를 미리 정할 수 있고, 호스피스에 대한 의사를 밝힐 수 있으며, 남겨질 가족을 위해 서류와 재산을 정리해 둘 수 있다. 하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이 찾아올지까지 계획할 수는 없다. 종활의 진정한 의미는 죽음을 지배하는 데 있지 않다. 죽음 앞에서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삶의 질서(秩序)를 미리 세워 두는 데 있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준비와 통제를 혼동할 때, 사람은 죽음 앞에서 오히려 더 큰 좌절을 겪는다.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을 이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오래 버티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빨리 체념하는 것도 아니다. 회복이 불가능한데도 응급실과 중환자실, 요양병원을 끝없이 오가며 생물학적 시간만 연장하는 것은 존엄한 삶의 마무리와 거리가 멀다. 이는 의학적 문제이기에 앞서 인문학적 문제다.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서부터가 연명인지, 어디까지가 돌봄이고 어디서부터가 방기(放棄)인지를 묻는 일은 결국 인간의 존엄(尊嚴)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과 같다.


그렇다고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만 앞세워 스스로를 짐처럼 여기는 것도 옳지 않다. 인간은 원래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다. 공자(孔子)는 인(仁)을 결코 홀로 완성되는 덕목으로 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의 존엄 역시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을 가능한 한 또렷하게 밝히고,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며, 남아 있는 이들과 이별의 말을 나눌 수 있는 데 있다. 관계의 마무리는 관계의 부정이 아니라 관계의 완성이다.


잘 죽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삶과 크게 모순되지 않게 마침표를 찍는 일이다. 통증을 덜고, 의사를 미리 정하고, 갈등을 풀고, 남겨질 사람들에게 혼란을 덜 남기는 것. 거창한 유산(遺産)이 아니어도 좋다.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 사과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고 조용히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죽음은 삶의 실패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마지막 질서다.


장자(莊子)는 죽음을 앞두고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하늘과 땅이 나의 관(棺)이요, 해와 달과 별이 나의 부장품이라고. 이 말은 초탈(超脫)의 과시가 아니다. 죽음이 삶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이미 깃들어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삶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책임지는 일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 온 사람이라면, 이제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준비된 죽음은 오늘을 더 또렷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다.



작가의 이전글요약과 AI에 사고를 외주 주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