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
우리 집의 두 합창단
나는 소싯적에 국가 행사에서 사회를 봤다.
거창한 건 아니다. “국기에 대해 경례” 정도의 멘트였다. 그것도 요즘은 어나운서 몫이다.
그래도 목소리 좋다는 말은 종종 들었다. 그 한마디가 용기가 되어, 무모하게도 퇴직 후 음악에 입문했다. 악기도 배우고, 합창단에 들어가 단장까지 맡았다. 예술의전당 무대도 십여 차례. 남들이 겉으로 보면 제법 그럴듯했다.
문제는 나는 악보를 못 읽는다. 초견은 당연히 안 된다. 아래 음자리표가 있는지도 몰랐고, 달세뇨(D.S.)가 뭔지도 모른 채 돼지 멱을 땄다. 멜로디는 전부 귀로 익혔다. 산골 출신이라 기차 화통이다.
어느 날, 지휘자가 지휘봉을 떨어뜨린 적이 있다. 내가 되돌이표를 몰라 혼자 다음 가사를 내리 불렀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가 오른쪽인데 나만 왼쪽으로 간 셈이다.
합창의 묘미는 묻어가는 데 있다. 짬이 쌓이니 자신 없는 부분은 최후의 안전장치, 립싱크. 입만 크게 벌리면 된다. 예술은 표정이 반이다.
수년간 성악가들에게 개인지도도 받았다. 그런데 아무도 박자를 문제 삼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을 빼세요”는 들었어도, “선생님, 반박 틀려요”는 끝내 못 들었다.
나이가 깡패라서였을까. 나는 그래서 내가 잘하는 줄 알았다.
환갑 기념으로 작은 음악회를 열 계획도 했다. 내 돈 들여, 지인들 불러, 양식과 포도주 곁들여, 요란하게 데뷔. 제대로 처 맞기 전까지는.
그때 아내가 말했다.
“아무도 말 안 해서 그렇지, 박자 자꾸 밀려.”
그리고 결정타.
“돈 처 들여가며 지인들 소리 고문하지 마. 돈 지랄한단 소리 들어.”
공연은 접었다. 코로나 이후 합창도 그만두었다.
내로남불이라고 아내는 다르다. 합창단 두 군데에 적을 두고 있다. 작년엔 카네기홀 무대에도 섰다. 내년에도 간다고 한다.
아내는 수학 전공에 피아노도 친다. 악보대로 정확히 부른다. 박자는 흔들림이 없다. 다만, 목소리가 작다.
내 눈에는 소질이 크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을 했다가는 밥을 굶을 위험이 있다.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노래가 아니라 생존이다.
합창이 있는 날이면, 나는 저녁을 기다린다. 아내가 합창단 남은 김밥을 싸 들고 오기 때문이다.
저녁 아홉 시.
나는 김밥을 기다리는 남편이다.
들리는 소문에는, 단장과 지휘자 사이에 “이제 그만…” 하는 기류가 감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당당하다. 졸업생 중 자기가 제일 선배라며, 존재 자체가 역사라고 믿는다. 75세까지는 한다는 회칙을 방패로 삼고.
가끔 생각한다.
나는 박자를 놓치고, 아내는 음량을 놓친다. 나는 열정이 앞서고, 아내는 원칙이 앞선다.
우리 집에는 두 개의 합창단이 있다. 하나는 무대 위의 합창단, 다른 하나는 식탁 위의 합창단.
나는 소리 크게 내는 남편, 아내는 악보대로 가는 아내. 그래도 아직은, 김밥 한 줄로 화음은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