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그도 미워할 줄도 알았다

무조건 관용과 용서만이 능사는 아니다.

by 김희곤

공자를 떠올릴 때 우리는 으레 온화한 얼굴을 그린다. 제자들을 감싸 안고, 실수를 덮어 주고, 먼 길을 찾아온 이방인에게도 따뜻한 가르침을 건네는 스승. 그 이미지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자의 전부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그의 절반만 읽은 셈이 된다.


공자는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잘못을 덕과 용서라는 이름으로 덮어 버리자고 말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공동체의 도덕 질서와 예의 구조를 허무는 것들에 대해 아주 분명한 혐오와 판단을 드러냈다. 공자에게 인(仁)이란 무른 감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능력이기도 했다.


《논어》 〈이인(里仁)〉의 한 구절이 그 점을 압축한다.


“唯仁者能好人,能惡人”


참으로 인한 사람만이 사람을 바르게 좋아할 수 있고, 또한 바르게 미워할 수 있다. 여기서 ‘미워함’은 사적인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식별이다. 감정이 아니라 판단이다.


〈양화(陽貨)〉에는 이런 문답이 있다. 자공이 묻는다.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공자는 답한다. 남의 악을 떠벌리는 자,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헐뜯는 자, 용감하지만 예가 없는 자, 과감하지만 막히고 고집스러운 자. 그는 이들을 미워한다고 했다.


이 대목이 중요한 까닭은, 공자가 겨냥한 것이 단순히 ‘나를 불쾌하게 만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지목한 것은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는 행위들이다. 남의 허물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 위계를 무너뜨리는 비방, 예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용기, 분별 없는 결단. 이것들은 모두 공동체를 안에서부터 허무는 힘이다. 공자는 악을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질서를 갉아먹는 구체적인 성향들을 하나하나 짚어 냈다.


관용은 그에게 분명 미덕이었다. 그러나 무분별함을 눈감아 주는 방임은 아니었다.


더 결정적인 장면은 〈헌문(憲問)〉의 짧은 문답에 있다. 누군가 묻는다. “덕으로 원한을 갚으면 어떻겠습니까?” 공자는 되묻는다. “그렇다면 덕은 무엇으로 갚겠는가?”


그리고 말한다. 원한은 직(直)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고.


이 문답은 짧지만 깊다. 공자의 윤리학이 무차별적 용서의 윤리가 아님을 선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는 선행과 가해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덕에는 덕으로 보답해야 하고, 원한은 ‘직’, 곧 바름과 공정의 원칙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때의 직은 사적인 복수가 아니다. 후대 주자학 전통은 이를 “마땅히 상 줄 것은 상 주고, 벌 줄 것은 벌 주는 것”으로 풀이했다.


공자는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사안을 바로 처리하라”고 말했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용서는 개인의 덕목일 수 있다. 그러나 공정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자를 엄형주의자나 처벌 우선론자로 읽는 것도 오독이다.


〈위정(爲政)〉에서 그는 말했다. 정령과 형벌로 이끌면 백성은 형벌만 면하려 할 뿐 부끄러움을 모른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 가지런히 하면, 사람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바로 선다. 〈안연(顏淵)〉에서 계강자가 “무도한 자를 죽여서 질서를 바로잡으면 어떻겠는가”라고 묻자, 공자는 단호하게 답했다.


“정치를 하는 데 어찌 죽임을 쓰겠는가?”


공자는 두 얼굴을 함께 지닌다. 악을 분명히 판단하는 얼굴, 그리고 형벌보다 덕과 예를 앞세우는 얼굴. 이 두 얼굴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그의 윤리학이 가진 긴장이자 깊이다.


《예기》 〈단궁상(檀弓上)〉에는 거친 장면이 하나 있다. 자하가 묻는다. 부모의 원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자는 답한다. 함께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여기며, 길이나 조정에서 마주치면 집에 돌아가 무기를 가지러 갈 것도 없이 곧 싸운다.


현대의 감각으로는 낯설고 거칠게 들린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적어도 초기 유가 전통은, 원한과 악행에 대해 무조건적인 양보와 망각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공자에게 정의란 관계의 해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관계의 마땅함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었다.


소정묘(少正卯) 이야기는 이런 공자의 단호함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후대의 전승이다. 《순자(荀子)》 〈유좌(宥坐)〉와 《사기(史記)》 〈공자세가〉는, 공자가 노나라의 정사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정묘를 처형했다고 전한다. 그 이유는 언변으로 그릇된 것을 꾸미고, 무리를 모아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라 했다.


다만 이 이야기는 《논어》에 없다. 남송의 주희조차 “제나라와 노나라의 비루한 선비들이 공자의 권위를 높이려 꾸며낸 말일 수 있다”고 의심했다.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읽힌다. 후대 유가가 공자를 기억할 때, 단지 부드럽고 온화한 교화자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악에 대해서는 준엄한 결단도 내릴 수 있는 인물로 형상화했다는 사실. 그 형상화 자체가 이미 하나의 메시지다.


결국 공자는 용서를 몰라서 단호했던 것이 아니다.오히려 그는 용서를 절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호할 수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흐리지 않는 분별이었고, 덕과 원한을 같은 자리에 놓지 않는 공정이었으며, 공동체를 허무는 행위를 예와 도의 이름으로 바로잡는 일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미움을 말했고, 덕을 말하면서도 직을 말했으며, 교화를 중시하면서도 질서의 파괴를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공자를 “무조건 관용과 용서만을 강조한 성인”으로 그리는 순간, 우리는 그의 절반만 읽게 된다.


그의 진짜 얼굴은 더 어렵고 더 엄격하다. 그는 부드러움만 가진 성인이 아니었다. 무엇을 용납할 수 없는지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