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技術)은 크기가 아니라 쓰임

자발(子發)의 도둑과 AI(인공지능) 시대의 통찰

by 김희곤

초(楚)나라 장수 자발(子發)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고르지 않았다. 그는 재주 하나만 있어도 휘하에 두었다. 남들이 보기에 하찮고 천해 보이는 능력이라도, 그것이 어느 순간 결정적 쓰임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둑질을 조금 합니다” 하고 찾아온 자도 물리치지 않았다. 부하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 바로 그 하찮아 보이던 기술 하나가 전세(戰勢)를 뒤집었다. 적장(敵將)의 목도리, 베개, 상투비녀를 차례로 훔쳐 오자, 적장은 공포에 질려 군사를 거두었다. 칼과 창이 아니라 침실을 드나드는 능력이 승패(勝敗)를 갈랐다.


이 고사(故事)는 오늘의 AI(인공지능, 人工知能)를 생각하게 한다. 많은 사람이 AI를 말할 때 늘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기술(技術)의 크기만 보고, 사용(使用)의 맥락(脈絡)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 AI는 인간처럼 생각하지 못한다”, “실수도 많다”, “감정도 없고 책임도 못 진다”라고 말한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발의 도둑도 정면 승부를 할 줄 아는 장수가 아니었다. 창을 들고 적진을 무너뜨릴 힘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침투(浸透)와 은밀함이라는 좁은 장기(長技) 하나뿐이었다. 문제는 그 기술이 크냐 작으냐가 아니었다. 어디에, 어떻게, 누구의 판단 아래 쓰이느냐였다.


AI도 마찬가지다. AI는 만능(萬能)의 두뇌가 아니다. 그러나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놓이면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와 범위로 일한다. 대량의 자료를 요약하고, 초안(草案)을 만들고, 반복 업무를 자동화(自動化)하고, 패턴을 찾아내고, 여러 선택지를 신속히 제시한다. 반대로 잘못 쓰이면 오류(誤謬)를 대량으로 복제하고, 그럴듯한 말로 무지(無知)를 포장하며, 책임(責任) 없는 판단을 확산시킨다. 같은 기술인데 결과가 이렇게 달라지는 이유는 기술 자체보다 운용(運用)과 설계(設計)의 차이 때문이다.


자발이 보여 준 통찰(洞察)은 단순하다. 사람들은 기술의 품격(品格)을 따졌고, 자발은 기술의 효용(效用)을 보았다. 부하들은 도둑의 신분을 보았고, 자발은 전장(戰場)에서의 역할을 보았다. 오늘 AI를 대하는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이는 AI를 두고 “겨우 글 몇 줄 정리하는 기계”쯤으로 여기고, 또 어떤 이는 “곧 인간을 대체할 절대지성(絶對知性)“처럼 떠받든다. 둘 다 피상적(皮相的)이다. AI는 숭배(崇拜)의 대상도, 경멸(輕蔑)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배치(配置)와 통제(統制)의 대상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문제 정의(問題定義)다. 자발은 “도둑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적장의 목을 베어 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필요하게 크고 위험한 임무였다. 대신 적장의 심장에 공포를 심는 일, 곧 심리전(心理戰)의 급소를 찔렀다. 기술 사용의 핵심은 능력 자체보다 목표 설정(目標設定)에 있다. AI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질문이 흐리면 대답도 흐리고, 목표가 불분명하면 생산물은 쓸모없는 잡음(雜音)이 된다. AI를 잘 쓰는 사람은 프롬프트를 화려하게 꾸미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묻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기술 사용은 입력(入力)의 기술이기 전에 판단(判斷)의 기술이다.


그래서 AI 시대의 경쟁력(競爭力)은 단순한 보유(保有)에 있지 않다. 누구나 AI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차이는 접근(接近)이 아니라 해석(解釋)과 편성(編成)에서 난다. 자발의 부하들도 그 도둑을 데리고 있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를 전쟁의 변수(變數)로 바꿀 상상력(想像力)은 없었다. 오늘 많은 조직이 AI를 도입하지만 성과를 못 내는 이유도 같다. 도입(導入)은 했으되, 어디에 투입(投入)하고 어떤 기준으로 검증(檢證)하며 누가 최종 책임(責任)을 질 것인지 설계하지 못한 것이다.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부릴 주체(主體)가 없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냉정해야 한다. AI는 스스로 방향을 정하지 않는다. 자발(子發) 없는 도둑은 그저 도둑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목적과 감독(監督) 없는 AI는 그저 빠른 계산기이거나, 더 위험하게는 빠른 착각 생성기(錯覺生成器)일 뿐이다. 그러므로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술 숭배가 아니라 기술 통솔(統率)이다. 더 많은 기능을 아는 것보다, 어떤 기능을 언제 쓰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속도보다 검증(檢證), 화려함보다 정확(正確), 자동화보다 책임이 먼저다.


결국 《회남자(淮南子)》의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기술의 가치(價値)는 크고 작음에 있지 않다. 기술의 가치는 쓰임[用]에 있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지성으로 볼 필요도 없고, 서툰 장난감으로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디에 놓고, 어떤 목표 아래, 어떤 책임 구조(責任構造) 속에서 쓰느냐이다. 자발은 도둑의 기술을 전쟁의 승리로 바꾸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능력이다. AI를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쓰는 능력 말이다.


기술(技術)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의미를 만드는 것은 사용(使用)이다. 그리고 사용의 품격(品格)은 결국 사람의 식견(識見)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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