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을 상대하는 그릇

항우(項羽)

by 김희곤

항우(項羽)의 어린 시절은 실패의 기록으로 시작된다. 사기(史記)는 적었다. 글을 배웠으나 이루지 못했고, 검술을 배웠으나 이 또한 이루지 못했다(項籍少時, 學書不成, 去學劍, 又不成). 끈기 없는 소년의 방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평범한 배움에 만족하지 못한 거인의 태동이었다.


숙부 항량(項梁)이 노해 까닭을 묻자 소년은 답했다. “글은 이름이나 적으면 그만이고, 검술은 한 사람을 대적할 뿐이라 배울 가치가 없습니다. 저는 만인을 상대하는 법을 배우겠습니다(書足以記名姓而已. 劍一人敵, 不足學, 學萬人敵).”


한 명을 이기는 기술이 아닌, 천하의 판을 흔드는 힘. 항우는 처음부터 바라보는 지점이 달랐다. 항량은 기뻐하며 병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항우는 대강의 뜻을 파악하자 더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略知其意, 又不肯竟學). 세밀함보다 기세로 시대를 압도하려 했던 그의 장점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난 대목이다.


진(秦)나라 말의 혼란은 그가 예언한 만인지적(萬人之敵)의 무대가 되었다. 거록(鉅鹿)의 결전에서 진의 주력을 궤멸시켰을 때, 제후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소년의 호언장담은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는 실체로 증명되었다. 그는 한 자루의 칼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장악했다.


비록 유방(劉邦)에게 패했으나, 그의 실패를 승패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 항우는 몰락 전까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백으로 천하를 뒤흔든 결정적 주역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이름을 적는 재주인가, 한 사람을 상대하는 기능인가, 아니면 세상을 감당할 힘인가. 큰 뜻이 큰 무대를 만든다는 사실을 항우의 삶은 증명한다.


그림: 코 파일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