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듯이 말하는 자들

복점(卜占)

by 김희곤

사람은 불안을 다루기 위해 지식보다 형상(形象)을 먼저 소비한다. 꽁지머리, 수염, 흰 한복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권위의 연출이자, 사상의 표지가 아닌 신비의 의상이다. 대중은 논증보다 분위기에 설득되고, 논리보다 인상에 굴복한다. 지혜의 실체보다 지혜로 보이는 연출이 더 큰 효력을 갖기 때문이다.


주역(周易)과 관상(觀相)의 대가들 문하에서 배운 적이 있다. 오래 지켜본 명리학(命理學)의 언설은 엄밀한 검증보다 넓은 해석의 기술에 기댄다. 맞으면 용하고 틀리면 해석을 바꾸는 후행적 설명은 지식보다 언변에 가깝다. 이는 인지심리학이 말하는 사후 확신 편향(Hindsight Bias)의 전형이다. 이미 일어난 결과를 두고 처음부터 알았던 것처럼 끼워 맞추는 뒤늦은 통찰, 그것은 무지를 가리는 가장 세련된 도구다.


어머니의 신앙도 결이 같았다. 잘되면 은총, 안 되면 시련이라는 논리 앞에서 신성(神聖)은 결코 손해 보지 않는다. 해석의 문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결과를 미리 맞히는 힘이 아니라, 어떤 결과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힘, 이것이 점복(占卜)과 신앙의 가장 질긴 생존 방식이다.


젊은 시절, 타인의 부모운을 잘못 짚어 사과한 적이 있다. 그는 오히려 크게 놀라며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숙부 호적에 입적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우연한 적중은 사람을 쉽게 현혹한다. 우리는 정확성보다 적중의 기억만을 과장하는 확증의 함정에 빠진다. 열 번 빗나간 말보다 한 번 맞아떨어진 이야기가 훨씬 오래 살아남아 신화가 된다.


역사적으로 권력 곁엔 늘 술사(術士)가 있었다. 좌씨전(左氏傳)의 숱한 복점(卜占) 장면은 점이 참이어서가 아니라, 권력이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유가(儒家)의 정통은 여기서 물러선다.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은 초월적 기이를 부정한 게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절제의 윤리다. 십익(十翼)의 핵심 또한 점산(占算)이 아니라 변화의 이치에 대한 도덕적 성찰에 있다.


문제는 미래를 아느냐가 아니다. 무엇이 앎이고 무엇이 위안인지를 구별하는 일이다. 점술은 불안을 임시 봉합하는 심리의 언어일 뿐이다. 그것을 학문으로 격상하는 순간 우리는 형상에 속고 분위기에 굴복한다. 고전 교양의 미덕은 신비를 소비하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이 왜 그토록 신비를 필요로 하는지, 그 가련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 있다. 미래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대개는 알 듯이 말할 뿐이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 미지(未知)가 아니라, 미지를 독점 해석한다고 자처하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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