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가 된 독서

지그문트 바우만

by 김희곤

액체가 된 독서, 녹아내리는 출판


지그문트 바우만의 렌즈로 보면, 오늘날 출판의 핵심 문제는 독서의 쇠퇴가 아니라 액체화다. 예전의 독서는 단단한 습관이었다. 한 권의 책을 사고, 저자의 세계를 긴 호흡으로 따라가며 의미를 축적했다. 이제 그 고체 형태가 녹아내리고 있다. 성인 독서율은 2023년 43.0%에서 2025년 38.5%로 줄었다. 이는 단순히 책을 덜 읽는다는 신호가 아니다. 오래 읽는 인간형의 소멸을 뜻한다.


시장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꾼다. 2024년 주요 출판사 매출은 정체됐으나, 단행본(4.3%), 웹툰·웹소설(22.1%), 전자출판 플랫폼(12.2%) 매출은 오히려 늘었다. 책의 종말이 아닌 무게중심의 이동이다. 깊고 무거운 활자보다 빠르고 가벼운 서사가 힘을 얻고 있다.


그 바닥에는 시간 경제의 변동이 있다. 청소년 94.2%가 숏폼을 즐기고, 성인 10명 중 4명이 스마트폰으로 짧은 영상을 매일 소비한다. 독자는 이제 완결된 세계로서의 책을 만나지 않는다. 피드 위를 떠다니는 문장 조각, 30초 요약 영상, 카드뉴스 같은 파편을 먼저 접한다. 책은 거대한 세계가 아니라 콘텐츠 피드의 일부가 되었다.


과거의 독서가 머무름의 예술이었다면, 액체근대(液體近代)의 독서는 스쳐 지나감의 기술이다. 예전에는 독자가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이제는 책이 독자의 피드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목차보다 썸네일과 발췌문이 중요해진 이유가 여기 있다. 한 권을 끝까지 읽지 않더라도 마음에 드는 문장 몇 개를 저장하고 요약본을 소비한다면, 시장은 그를 독자로 계산한다. 깊이가 얕아진 것이 아니라, 독서의 단위가 쪼개진 것이다.


긴 글이 짧은 글에 밀리는 현상은 취향의 저하가 아닌 환경의 필연이다.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력 구조의 변화다. 끊임없는 알림과 플랫폼 이동 속에서 한 텍스트에 머물 조건 자체가 해체됐다. 이제 출판은 내용의 질을 넘어, 독자의 흩어진 시간을 어떻게 재구성할지 고민해야 한다.


진정한 위기는 판매량 감소가 아니다. 책이 삶의 기본 형식이 아닌 수많은 콘텐츠 중 하나로 재배치되었다는 사실이다. 액체가 된 시간 속에서 다시 머무름의 형식을 발명해야 한다. 첫 문장에서 붙들고, 중간에서 밀어주며, 끝내 독자의 삶을 돌아보게 해야 한다. 출판은 이제 책을 만드는 제조법이 아니라, 흩어진 주의(注意)를 한 덩어리의 사유(思惟)로 응결시키는 기술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