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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일팔 May 01. 2023

관용과 용기라는 씨실과 날실

영화 <팬텀 스레드> (2017), 폴 토마스 앤더슨

※ 이 글은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관용 없는 용기(혹은 자신감)는 만용이다. 무례하며, 상대방을 다치게 만든다.

용기 없는 관용은 방관이다. 무력하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구해내지 못한다. 

씨실과 날실을 함께 엮어야 옷이 완성되듯, 관용과 용기를 모두 갖출 때 비로소 사랑과 인간은 완성된다. 그리하여 막음날 자신의 외로운 혼(魂)을 건져낼 수 있을 뿐더러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혼마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핏보면 이 영화는 상당히 고정관념에 박혀있고, 이분법적이며, 뻔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중년의 남자는 도시에 살며 세련되었고, 내노라하는 드레스 디자이너다. 젊은 여자는 시골에 살며 촌스럽고, 가진거라곤 쥐뿔도 없다. 남자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고, 당연하게도 그러한 자신감은 일과 상관이 없는 부분에서도 발휘가 된다.


일의 스트레스를 피해 시골에 내려간 남자는 그곳에서 여자를 만나게 되고, 마음에 들었는지 데이트 신청을 한다. 여자는 그 신청을 받아들인다. 저녁을 먹고 둘은 남자의 집으로 가게 되고, 자신이 만든 옷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한다. 그 일이란 여자의 신체치수를 재고, 그에 맞는 옷을 짓는 것이다. 그 후 여자는 남자와 함께 도시로 올라가고, 남자의 뮤즈이자 모델이 된다. 


도시에서는 직업적 탁월성이 인간의 완성을 평가한다. 그곳에서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 役)은 강박적인 자기통제를 통해 자신만의 시스템을 만들어 그 탁월성을 구축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 어떤 사람(주로 뮤즈들)이 그 시스템을 거부하면, 우드콕은 변화를 택하기 보다는 그 사람을 내쫓고 자신의 제국을 공고히 하는 편을 택한다.


즉, 우드콕은 변화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유행(chic)을 거부하며, 항상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행동을 해야한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어린 시절 그가 겪었던 트라우마에서 기인한다. 16살 때, 그의 어머니는 재혼을 해서 우드콕을 떠나간다. 자신은 어머니가 입을 웨딩드레스를 직접 만들어 그 결혼을 축복했음에도, 그 뒤로 어머니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 그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완벽을 추구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드콕에게 옷 짓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그의 어머니다. 어머니가 가르쳐 준 방식으로 직업적으로 성공했고, 그래서 인생의 나머지 부분도 어머니의 방식대로 완성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떠나 돌아오지 않듯, 자신도 떠난 사람에게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어머니가 변하지 않았듯, 자신도 변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어머니의 방법으로 상처를 주었듯, 그 역시도 어머니의 방법으로 남에게 상처를 준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드콕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방법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줬던 저주(혹은 상처)가 저주임을 부정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래서 어머니가 가르쳐 준 방식대로 옷을 만들고는 그 솔기 안에 'never cursed(저주받지 않았다)'라는 문구를 달아놓는 것일게다. 마약 환자 등 정신적인 질환을 안고 있는 사람의 대부분이 자신의 병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드콕의 세계 안에서 살아감에도, 우드콕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시릴.

우드콕의 상처받은 제국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 시스템에 순응하거나 침묵하는 사람들 뿐이다. 특히 그의 누나 시릴(레슬리 맨빌 役)은 우드콕의 잘못된 점을 알면서도 그에 대해 침묵하는 사람이다. 알마를 마음에 들어하고 우드콕이 그녀를 대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알마를 지키려는 행위는 고작 "그 애(알마)에게 상처주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 애가 맘에 들거든."이라는 말뿐이다. 우드콕의 옷이 유행에 뒤쳐졌음을 앎에도, 그녀는 우드콕에게 그러한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시릴은 다른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지만, 그 다름을 보호하려는 용기는 가지지 못한 방관자다.


알마(빅키 크리엡스 役)는 우드콕의 제국을 부정하면서도 쫓겨나지 않고 처음으로 그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차지한 사람이다. 사실 그녀는 우드콕의 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그녀는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고 우드콕이 자신의 영역을 침입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카페에서 그녀가 우드콕에게 건넨 쪽지에는 자신의 이름과 인삿말이 적혀있었다. 우드콕이 상당히 무례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 사이즈를 측정하자, 그 다음날 "뭘하든 사려깊게(혹은 배려있게, 신중하게)해요. (Whatever you do, do it carefully.)"라는 충고를 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영역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영역을 철저히 존중해주는 사람이다. 단순히 존중하는 것이 아닌, 용기를 가지고 실제로 행동에 옮긴다. 바바라 로즈라는 여자가 재혼을 할 때, 우드콕이 그녀의 옷을 만들기 싫어하는 이유 역시도 재혼 이후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극 중 초반에 자신의 외모에 자신 없어 하던 백작 부인이 우드콕의 옷을 입고 당당하게 무도회에 참석하는 모습과는 반대로, 로즈는 우드콕의 옷을 입었음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 여러모로 바바라 로즈는 우드콕의 옷을 입을 자격이 없는 여자다. 그렇지만 우드콕은 감히 자신의 손님(혹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만든 옷을 벗으라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때 알마가 나서서 바바라 로즈가 입은 옷을 벗겨온다. 그 뒤 우드콕은 알마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알마는 우드콕이 자신을 그의 동반자로 여기며, 자신의 영역을 인정해주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드콕의 의상실에서 우드콕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방식대로(시릴과 직원들을 모두 보내고, 아스파라거스를 버터에 졸이고) 우드콕을 기쁘게 해주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드콕의 입장에서는 의아할 뿐이다. 그는 알마가 바바라 로즈의 드레스를 벗겨온 사건 이후로 자신에게 알마는 없어서는 안될 부품(더없이 필요한 부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버림 받은 우드콕에게 사랑이란 필요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필요는 존재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에게 사랑이란 그저 영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알마에게는 사랑이란 자신을 구성하는 성분이다. 이 성분은 다른 성분으로 대체될 수 없다. 알마의 사랑 방식은 자신의 모두를 주는 것이다. ("have given him what he desires most in return—every piece of me.") 그리고 알마는 우드콕 역시 그러길 바란다.


알마 : 내가 예상한 결과는 아니에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지만, 좋은 뜻에서 그랬어요.

우드콕 : 그럼 도대체 뭘 기대했는데?

알마 : 나는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당신을 혼자서 가지고 싶었다구요.

우드콕 : 당신은 항상 나를 가지고 있었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알마 : 아니, 아니에요. 항.. 항상 주위에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러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죠.


우드콕이 사랑을 필요 이상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자신이 사랑에 관한한 저주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마 역시도 우드콕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방식이 결국에는 엄마에 대한 복수이며,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해 자신을 포함한 여자들을 가지고 노는 게임이라고 오해한다. 허나 그러한 사랑방식은 우드콕 자신에게는 사랑 때문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는 자기 방어기제이자, 그따위 사랑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의 수단일 뿐이다.

알마 : 당신은 저주받지 않았어요. 난 당신 사랑해요. 이런 게임 집어치워요.

우드콕 : 무슨 게임? 내 게임이라는게 도대체 뭔데? 

알마 : 당신의 규칙과 옷, 돈. 이게 다 게임이죠!

우드콕 : 당신은 변했어, 내 저녁을 망치려고 나타났나? 내 인생까지 망치려고?


이 사건으로 인해 둘의 사이는 급격히 틀어진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알마는 우드콕이 가지고 있는 저주의 작동방식을 깨닫는다. 이제껏 우드콕은 자신이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알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저주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더욱더 그 저주(사랑)에 연연하지 않는 자신을 만들어나간 것이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그 트라우마가 닥치는 상황에서는 어쩔 줄 몰라하지만, 평소에는 오히려 그러한 트라우마에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래서 우드콕은 어머니가 준 저주를 거부하기 위해서, 자신이 나약하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마저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이 불멸의 존재라고 '착각'한 것이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믿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삶은 붕괴될 것이므로.)


알마는 그 저주가 다시 우드콕에게 들이닥칠 때, 즉 우드콕이 옷을 다시 만들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 저주는 저항하고 거부해야 되는 것이 아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드콕이 그 저주를 받아들여야만 자신의 사랑도 완성되므로. 이제껏 우드콕의 뮤즈로 그가 만든 옷을 수차례 입었지만, 정작 그 중에서 자신만을 위한 옷은 한 벌도 없었다. 우드콕이 만든 옷(저주)을 가진 모든 여자(엄마, 연인, 고객)는 모두 우드콕의 곁에 머무를 수 없었다. 우드콕이 만들어준 옷을 입고 우드콕의 곁에 있으려면, 우드콕이 그 저주를 곁에 두고 인정하는 수 밖에 없다.


알마가 우드콕에게 먹인 첫 독버섯은 어쩌면 인간 모두가 지닌 숙명적인 저주일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는 저주. 우주의 끝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필멸(必滅)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 이 저주는 치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삼키고 나아가야 하는 독(毒)이다. 남에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기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일인 의사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쫓겨난 것이다.


우드콕이 심연의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알마는 처음으로 자신이 옷을 만든다. 진정으로 우드콕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려면, 자기 없이도 세상이 멀쩡히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독버섯과 드레스. 필멸을 거부하던 사람이 죽음을 겪고 왔고, 그 죽음을 겪는 동안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안 사람은 비로소 타인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그래서 우드콕은 알마에게 청혼을 한다.

두 번의 "Will you marry me?" "Yes"

그러나 많은 주례사에서 얘기하듯, 결혼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결혼이 끝이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공존해야할 필요성을 인정했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와 동등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의 남성 중심 사회가 작동해온 방식이기도 하다. 허나 서로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기 때문에(신혼여행지에서 알마는 등산을 가고 우드콕은 독서를 한다), 상대방을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절대로 쉽지 않다. 그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이 기존에 속해있던 집단은 끊임없이 두 사람을 원래있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하기 때문이다. (하비의 늙은 엄마가 알마를 험담하는 장면, 젊은 하비가 알마를 무도회에 초대하는 장면).


특히 우드콕은 이제까지 알마의 세계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항상 자신의 세계로 알마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에서만 살던 우드콕이 알마의 세계인 무도회에서 우드콕이 처음 느끼는 감정은 당혹감, 허탈감,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곳, 하지만 알마의 세계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간다. (우드콕의 심정을 대변하는 음악과, 무도회의 음악이 겹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알마의 세계에서 발견한 알마는 우드콕의 세계에서 살던 알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알마는 자신의 세계를 낯설어하는 우드콕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한번도 들어온 적 없었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 가졌던 용기, 그가 가져야했을 당혹감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준다. 그로 인해 자신의 세계가 아수라장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서로를 사랑하기에 다시 쌓아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드콕 또한 자신의 세계에 들어와 꿋꿋하게 버텨내던 알마의 독한 사랑을 돌이켜보며, 사랑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세계가 무너져도 사랑만 있다면야.


그렇기에 우드콕은 알마가 주는 독버섯을 알고도 먹는다. 어쩌면 그가 나서서 먹자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저주였던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러한 정신적 트라우마는 여전히 치료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지만, 어쨌든 인간의 숙명보다는 병(病)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의사인 하디가 알마와 얘기나마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디가 그들의 병적이면서도, 또 독한 사랑을 이해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필멸의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숙명, 가장 큰 상처가 되었던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 그 두 가지 독(毒)을 차고 우드콕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는 이제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맡길 줄 알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관용을 갖추게 되었다. 한 번도 시릴에게 옷 짓는 일을 맡겨본 적이 없던 우드콕이 자식을 시릴에게 맡기고 알마와 함께 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떠나보내기 위해 옷을 짓지 않을 것이다. 마지 못해 옷을 짓는 일도 없을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옷을 만들 것이다. 사랑이 인간을 보다 완성된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과 신념을 실행할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의 엔딩, 알마의 꿈이 이뤄진 순간.


그런 점에서 어쩌면 알마는 이미 두 가지 모두를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 완성될 예정에 있는 '인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남성의 성역할인 '용기'와 여성의 성역할인 '관용'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알마 역을 맡은 빅키 크리엡스를 화면에서 봤을때 중성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영화에서도 알마는 자신의 납작한 가슴과 넓은 어깨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알마가 남성과 여성의 모습을 모두 갖추었듯, 용기와 관용을 갖춘 인물이다.

이러한 알마의 모습과 성격은 이상적인 여성의 신체로 남성의 행동을 반복하던 요즈음 대중적인 페미니즘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스타워즈의 레이, 원더우먼, 매드맥스의 퓨리오사)와는 다른 점이 많다. 그러한 캐릭터들을 처음 볼 때는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를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 벅참은 곧 식어버리고 공허함만이 남게 된다. 현실에서는 그러한 여성 영웅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남성 영웅도 없다.) <팬텀 스레드>는 다르다. 여성은 여성의 고정관념에 박혀있고, 남성은 남성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다. 꼰대같은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는 통쾌함도 없다. 


PTA의 목표는 여성이나 남성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한 '인간'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소 상투적이면서도 뻔한 이분법적인 설정으로 인물을 나눠놓은 것이다. 용기라는 남성적 덕목과 관용이라는 여성적 덕목 모두 아름다우며, 동시에 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용 역시도 보여주기식으로 과도해진다면 '천박'하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도시와 시골, 늙음과 젊음, 세련됨과 촌스러움, 전통과 변화 모두 아름다우며 동시에 추하다. 삶과 사회에는 성장과 퇴보, 저주와 축복이 혼재한다. 남성이라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이며, 여성이라는 것도 축복이자 저주이다. 사회화 역시 성장이자 퇴보하는 과정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로 태어난 것 자체가 축복이자 저주 아니겠는가.


결국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축복받은 삶을 사는 것이다. 여성성과 남성성, 시골과 도시, 변화와 전통 모두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도구적 수단일 뿐이다. 우드콕이 이뤄주었던 알마의 꿈 역시도 어쩌면 그가 만들어준 옷(심지어 코르셋을 입어야 한다!)을 입고 전통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알마의 꿈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정답이지만, 절대적이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수단을 목적으로 삼을 것을 강요한다. 그런 와중에 사랑, 용기, 관용 같은 덕목들은 오히려 도태되고 말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들 떼 속에서 막음날 내 외로운 혼(魂)을 건지려면, 독(毒)을 차고 선선히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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