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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산실 금속공예가 Apr 05. 2024

4. 불행한 별일 있던 시절 1 (20대)

복학 전, 별일 없는 행복한 시절이 계속될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수강신청을 하고 전공 수업을 들을수록, 조금의 사회 경험은 모든 배움을 돈과 연관시켜 생각하게 했다. 곧 사회에 나가면 뭘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나? 이게 돈이 되나? 이 생각뿐이었고, 당연히 작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복학 후 고학년이 되면서 망치질을 배우게 되었다. 망치질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면을 늘리는 단조 망치, 싱킹 망치, 각도를 올리는 레이징 망치, 표면을 고르는 플래니싱 망치, 망치 자국을 내는 체이싱 망치 등이 있었다. 그리고 각 작업 단계별로 열풀림 작업도 해줘야 했다.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망치질을 하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는 답답함을 느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생각이 복잡할수록 문제를 단순화하고 집중해야 했다. 작업을 즐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날린 것 같은 후회와 아쉬움이 남아 있다.


그때의 나는 망치질하면서 한 번 두드리는데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생각했다. 3개월 동안 망치질 해서 구리 동판을 화분 모양으로 만들어도 백만 원에 누가 사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터키의 금속 장인들은 7살 때부터 망치질을 한다고 하니 3개월이면 어마어마한 화분을 만들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생산성을 내지 못했다. 재료비가 너무 비싸서 똥손인 내가 만지면 재료를 망치는 것 같았다. 예술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마음에 금속공예는 효율성과 생산성이 떨어지는 3D 업종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실력이 있고 잘했다면 이런 잘못된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가 불확실하니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였던 시기 이기도 하다.


졸업한 선배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 인테리어 회사에서 공간 디자인을 하는 선배, 가구 회사에서 제품 디자인을 하는 선배, 주얼리 회사에서 브랜드 디자인을 하는 선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면서 주얼리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내가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가구나 인테리어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생소한 분야였다. 이렇게 분야가 다르다는 것은 각자도생이라는 이야기였다.


이 당시 불미스러운 소문과 뉴스는 취업 준비를 하는 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다. 타학교의 한 졸업생이 모교에 찾아가 작업실 한편에 있는 사용 하다 남은 구리 쪼가리들을 훔친 사례. 또 다른 사례로는 금세공업자가 금 가루들을 모아서 생계비에 보태 쓰다가 걸렸다는 내용들이었다. 마음이 떠나니 부정적인 소문만 귀에 들어왔다.


이 시기 중국으로 진출한 회사에 취업하는 것도 활발하였다. 하지만, 취업비자 없이 관광비자로 일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 4대 보험도 없고, 이직하면 경력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가방 공방 같은 일자리도 있었는데 월급이 없는 열정페이라고 들었다. 이것도 소개를 받아야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암울해 보이는 미래에 비용을 지불하고 시간까지 투자하는 것이 답답하기만 한 시기였다.


현실을 마주하니 머리는 복잡했고 미술을 선택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고등학교 때 놀고먹고 시간을 보낸 것이 이제야 벌로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 분야는 실력이 없이는 먹고살기가 쉽지 않다. 어느 분야로 취업 준비를 할지 결정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이대로 계속해서 미술을 해야 할까? 내 인생은 이대로 나가리인가? 불안과 좌절감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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