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숙천을 품다

왕이 잠든 길. 산책이야기

by 구현

작년 봄, 다산신도시로 이사를 왔다. 공공임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된 행운도 좋았지만, 내게 더 귀한 것은 왕숙천의 평탄한 산책로였다.


오십 대 초반, 무릎 수술을 겪은 후 나는 쪼그리고 앉지 못하고 내리막길은 곤욕이다. 내게는 오직 평탄한 길이 절실했다. 새집으로 이사하며 처음 마주친 이 길은 마치 나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만 보를 넘기면 어김없이 무릎이 신호를 보낸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통증. 이제는 익숙하다. 오히려 이 통증이 걷는 속도를 조절하는 오랜 친구 같다. 초봄의 차가운 바람이 불 때면 무릎은 더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그 통증마저도 이제는 이 길과의 대화처럼 느껴진다.


왕숙천(王宿川).


포천에서 시작해 한강으로 흐르는 이 강의 이름은 '상왕이 머물렀던 하천'이라는 뜻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 팔야리에서 8일 밤을 묵었다고 한다. 육백 년 전 이 강가에 선 왕의 발걸음을 상상해 본다. 그도 나처럼 이 물가를 거닐며 어떤 고뇌를 달랬을까.


그 건너편, 동구릉의 푸르름 너머에는 천하를 호령하던 왕들이 잠들어 있다. 왕들은 멈췄지만, 강은 오늘도 멈추지 않고 흐른다.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강물처럼, 내 삶도 변화하더라도 흐름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강처럼, 바람처럼 걷는다. 느리지만 꾸준히. 아침 햇살이 수면을 반짝이게 할 때도, 저녁노을이 강을 붉게 물들일 때도, 나는 이 길을 걷는다.


살다 보니 이런 호사를 누린다. 왕이 머물고 왕이 잠든 강 옆을 매일 걷는 호사. 무릎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통증보다 만족감이 더 크다.


내일도 이 길을 걸을 것이다. 왕들은 멈췄지만, 강은 흐르고, 나는 나만의 속도로 계속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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