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벼루는 백성들의 밥그릇이라네.

부임을 지나 율기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by 구현

다산초당.

전라도 강진 유배지. 정약용이 머무는 작은 집이었다.


어느 봄날, 한 젊은 유생이 찾아왔다. 멀리서부터 소문을 듣고 온 스물셋 청년이었다. 그는 정약용의 학문을 사모하여, 가르침을 청하러 왔다고 했다.


정약용은 초당으로 유생을 안내했다.


유생이 서재에 들어서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작은 서가. 거기 꽂힌 책은 열 권 남짓. 명망 높은 학자의 서재치고는 너무도 초라했다.


"선생님."


유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 이리 책이 적습니까?"


정약용은 빙그레 웃었다.


"책이 적은가?"


정약용은 마루로 나섰다.


"저기 보이는가."


유생이 따라나섰다.


툇마루 아래로 작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농부들이 허리를 굽혀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한 아낙이 논둑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내 진정한 책은 저기에 있네."


정약용이 말했다.


"백성들의 땀과 눈물. 그들이 사는 현실. 그것이 내 책이네."


유생은 말없이 논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궁궐에 가고 싶은가?"


정약용이 물었다.


"예, 선생님. 언젠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기억하게."


정약용이 농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궁궐의 화려한 지식보다, 저 밭의 땀이 더 중요하네. 중앙의 무거운 명예보다, 저들의 밥그릇이 더 소중하네."


"밥그릇이요?"


"내 벼루는 백성들의 밥그릇이라네."


유생은 정약용을 바라보았다.


"벼슬을 얻거든, 짐을 가볍게 꾸리게. 화려한 벼루와 귀한 종이는 궁궐에 두고 오게. 백성의 밥그릇이 자네의 벼루가 될 것이니."


바람이 불었다. 논에서 흙냄새가 날아왔다.



세월이 흘렀다.


유생은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을 얻었다.


부임지로 떠나기 전, 그는 짐을 꾸렸다.


무엇을 가져갈까.


경전, 몇 권.

작고 투박한 벼루와 먹.

백지 몇 장.


'백성의 현실을 기록하기 위해.'


다산의 말이 떠올랐다.


"자네의 책은 현장에 있네. 자네의 벼루는 백성의 밥그릇이라네."



당신이 챙긴 짐.

거기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화려한 지식인가. 명예인가.


AI가 챙겨야 할 짐은 기술의 자신감이 아니라,

사용자의 현실을 기록할 빈 노트여야 한다.


이제 궁궐을 떠날 차례다.


백성에게 충성할 것을 다짐할 시간이다.





[내일 계속]

가장 어려운 싸움. 목민심서 제2부 율기(律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