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에 대하여

작가를 소개하는 자전적 에세이

by 구현

서른 후반, 조그맣게 하던 공장이 망하고 길바닥에 나앉았다. 은유나 비유가 아니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지인의 소개로 도로공사 현장에서 일용직을 시작했다. 당장 돈이 되는 일용직은 그때 유용했고, 그렇게 마흔이 넘어 아예 내 직업이 되었다.

일은 고되었다. 경계석을 놓고 측구를 치고 보도블록을 깔았다. 오래되어 터져 나간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새로 포장했다. 낮에는 물론 밤새 일하는 날도 많았다. 교통량이 많거나 사람이 몰리는 도심지는 심야에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은 육체적 고됨만이 아니었다. 보통의 건설 현장처럼 제대로 된 가림막도 없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된 현장이라 별의별 일이 다 생겼다. 멀쩡한 도로를 파헤친다고 정치권까지 거론하며 고함지르고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다. 밤샘 작업이 조금이라도 늦어져 차가 막히면 온갖 욕설을 들었고, 경찰이 와서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이기도 했다. 도로공사 현장은 말 그대로 세상의 '을'이었다.


도로공사는 겨울에 일이 없다. 날이 추워 땅은 얼고 뭘 해도 하자만 날 뿐이다. 12월 중순이면 관급 도로공사는 모두 끝이 났다. 무턱대고 놀 수만은 없어 여기저기 일을 찾아봤다. 운이 좋으면 '날일'을 나가기도 했지만, 거의 대책 없이 노는 날이 태반이었다. 어느 현장이든 겨울에는 일감이 줄었고, 일하려는 사람은 줄을 서고 일당은 줄었다. 맛집의 줄보다 더 가혹했다. 그 줄 끝에는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흔 중반의 어느 겨울이었다. 일이 없는 날에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집 나가면 돈만 쓰니까.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어느 날, 아이들 책장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오로지 하루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저 시간을 때울 겸 낯선 이의 하루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책은 얇고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읽은 책이었음에도 술술 읽혔다. 이야기 배경이 수용소였기에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점점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시간이나 때우려 시작했던 독서에 어느 순간 깊이 빠져들었다.


책에는 벽돌을 쌓는 장면이 나온다. 모르타르를 개고 벽돌을 날랐다. 반장이 작업반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작업을 재촉했다. 모르타르와 벽돌이 원활하게 올라오고 기공(技工)들의 손놀림은 민첩했다. 현장의 느낌이 제대로 났다. 내가 하는 일이라 더욱 공감이 갔다. 그들의 모습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그들은 일당을 받기 위해 벽돌을 쌓는 것이 아니었다. 수용소의 그들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벽돌을 제대로 많이 쌓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에 맞춰 집합하고 인원수를 확인받아 무사히 복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집합 시간에 늦어 봉변을 당할 뻔했지만, 그들은 모두가 무사히 수용소로 복귀했다. 그의 하루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장면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그해 겨울, 그 책을 열 번 넘게 읽었다.


이른 봄, 공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지나는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멀쩡한 보도블록과 아스팔트 도로를 걷어낸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땅을 파면 온갖 종류의 배관이 나온다. 하수와 오수가 흐르는 배관, 수도관, 통신선이 지나는 배관, 도시가스 배관, 가로등 배관과 2만 2천9백 볼트의 고압선이 지나는 주름진 배관까지 나온다.

마치 사람의 멀쩡한 배를 가르고 병든 장기를 치료하듯, 도시의 건강을 위해 땅을 파고 보수하는 일은 역시 그에 못지않게 신중해야 한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서둘러 도시를 재건하고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다. 도시의 내장이 뒤죽박죽 엉켜버린 것은 숨 가쁘게 지금의 도시를 만들어 온 시간의 흔적이었다. 오래되어 녹슨 수도관을 드러내지 않으면 녹슨 물을 마셔야 한다. 업그레이드된 값비싼 통신선을 매설해야 했다. 인터넷 없이 하루도 못 사는 세상이 되었다. 도시의 흉물이 되어버린 전봇대를 뽑아내고 땅속에 심었다. 낡은 하수관으로 하수가 새어 나와 싱크홀이 생기거나, 비와 눈에 견디지 못한 아스팔트가 파여 타이어가 찢어지고 차가 전복되기도 한다. 땅을 파고 보수하는 이유는 너무도 많고 다양하다. 그건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도시의 숙명이다.


누가 욕을 하고 시비를 걸든, 문제가 생기면 보도나 차도든 걷어내고 땅을 파야 했다. 그리고 다시 원상 복구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매일 같은 문제가 반복되었고, 대책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놀라운 기적은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 시작되었다. 소설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다. 일을 하는 내내 책 속의 그들이 떠올랐다. 우리나라가 아닌, 먼 나라 수용소에서 벽돌을 쌓은 그들. 그들의 모습은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몸은 고되었지만, 내가 하는 일에 이전보다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나는 서서히 깨달아갔다.


왜 그들이 수용소라는 곳에서 강제 노역을 하면서도 목숨이 걸린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벽돌을 더 쌓으려 했는지 말이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격을 그들은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먹고 자는 것뿐만 아니라 숨 쉬고 생각하는 것조차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한마디로 짐승만도 못한 수용소 생활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유일하게 인간일 수 있었던 시간은 노동의 시간이었다. 일당도 없고 아무런 혜택도 없는 그들의 노동을, 그들은 스스로 가치를 만들었고, 그래서 그들은 분명한 인간이었다. 인간의 굴곡진 역사는 그렇게 자유와 평화와 인권을 힘겹게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 이십 년 가까이 일용직 도로공사를 했다. 이제 반장이 되었고, 아이들은 대학에 갔다.

때론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나는 내가 해온 노동에 감사한다. 덕분에 먹고살았고,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품격을 스스로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든, 나는 노동으로 인간적인 삶을 해결했다. 그리고 힘이 닿는 한 계속 일할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가지려면, 나의 노동뿐만 아니라 상대의 노동에도 예의를 지켜주어야 한다. 땅을 파고 도로를 복구하는 일은, 도시의 핏줄과 생명줄을 유지하는 일이다. 심야 시간에 도로를 차단하고 공사를 하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 되었다. 과속과 음주차량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나 또한 직접 겪은 일이다. 현장으로 돌진한 과속 차량에 치여 구급차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운이 좋아 큰 상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려 건널목도 제대로 건너지 못한 날들이 있었다.

수많은 공사 안내 간판과 막대한 돈을 들인 안전장치도 소용없었다. 핸들을 잡은 운전자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사고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도로공사 현장을 지날 때 가속 페달에서 발을 잠깐 떼는 일. 그것이 수많은 돈을 들인 안전대책보다 생명을 살리는 데 훨씬 더 유용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게 품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겨울 그 소설을 읽고 또 읽은 후, 내가 하는 도로공사 일은 내 자부심이 되었다. 대충 일하면 하자와 사고가 생기는 법. 일용직이라는 개념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땅을 파고 메울 때도, 보도블록 하나를 까는 순간에도,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한 권의 책이 이토록 대단한 힘을 가졌다.


길을 걷다 만나는 다른 도로공사 현장의 작업반들을 유심히 보게 된다. 그들 역시 고단한 모습으로 묵묵히 일하고 있었지만, 때로는 몹시 처량해 보였다. 늙고 허름한 작업복 차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젊은이들의 얼굴.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나는 이들의 시선과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도시는 늙어가고 그 내장은 썩어 갈 것이다. 도로 위에서 땀 흘리는 이들의 삶과 노동을 존중하는 시선. 그것이야말로 이 도시를 건강하게 지키고, 우리 모두가 최소한의 품격을 지키며 살아가는 길은 아닐까.


자율주행 차량이 다니는 미래에도, 도로는 물론 보도 또한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걸어야 하고 차는 다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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