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점등식

by 구현

내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갈기갈기 찢겨 있다. 전압을 머금은 채 살아있는 수많은 전선들이, 절연바스켓을 타고 올라가는 나를 무심히 내려다본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 한복판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먹잇감을 관찰하듯이. 한겨울의 청명한 바람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의 긴장한 눈동자를 현란하게 흔들어댄다.


밋밋하게 이어진 낙뢰방지선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머문다. 그 아래 2만 2천900 볼트 고압선들이 머리에 닿을 듯 다가온다.


울렁거리는 절연바스켓을 다독거려 그 아래 어지럽게 늘어진 저압선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작업공간을 확보한다. 불법으로 설치된 온갖 케이블까지 겹쳐 시야는 더욱 어수선하지만, 이내 문제의 지점을 찾아낸다.


고압선과 변압기 연결 부위, 낡은 부품이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 절연바스켓을 미세하게 조정해 근접한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킨다. 양쪽 어깨부터 팔을 감싸는 두꺼운 절연복으로 무장했지만, 그 속의 내 심장만은 거센 불꽃 주변을 맴도는 날벌레처럼 위태롭게 고동친다.


출근길에 확인한 문자 메시지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인천지부 조합원의 사망소식이었다. 고압선 애자 교체 작업 중 감전사고를 당한 그는 양팔과 다리를 절단하는 몇 번의 대수술 후 의식이 돌아왔지만, 정신적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로 결국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바람이 차다.


20년 전, 제대하고 이 일을 시작할 땐 그렇게 오르고 싶었던 그곳이었다.


노련한 전공(電工)이 되고 싶었다. 그것만이 그때의 유일한 꿈이었다. 전봇대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자재 이름을 외우고, 전공들의 손놀림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그들을 숭배했다. 이를 악물고 일을 배웠다.


경력이 쌓이고 나의 꿈은 이루어졌지만, 끔찍한 사고는 끊이지 않고 내 주변을 맴돌았다. 베테랑이라는 훈장은 언제든 부고장으로 바뀔 수 있는 위태로운 이름표였다.


냉철하게 뻗어있는 고압선을 휘감아 도는 한겨울의 찬바람은 두꺼운 절연장갑의 미세한 틈새를 파고들어 굳은살로 무장한 손마디마저 시리게 한다. 하지만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젖어간다.


낡은 부품을 교체하고 변압기 상태를 점검한 뒤 작업을 마무리했다. 안전화가 땅에 닿고, 여기저기서 피워 문 담배연기가 달게 펴져나간다. 회사로 복귀하는 작업차량의 행렬이 지는 석양에 지쳐 보이지만, 덜컹거리는 지면은 너무도 평온하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퇴근길 발걸음이 몇 번을 망설이다, 집 근처 마트로 향했다. 아내의 잔소리가 뻔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난 주말, 9살 막내가 마트에 진열된 크리스마스트리를 어찌나 유심히 바라보던지.


"아빠! 우리도 크리스마스트리 장식해요. 정말 멋있잖아요."


내 팔에 매달린 아이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온갖 색상의 작은 불빛들이 가득 차 있었다.


마트 계산대를 막 빠져나올 때였다.

경쾌한 캐럴이 트리를 안은 내 오른팔을 뜨겁게 달구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작은 트리 옆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아이들은 거실에서 잠들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쉴 새 없이 깜빡인다.


무사한 하루를 감사하는 기도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깊고 고요한 밤이다. 애써 잠을 청한 지 한참 지났지만, 아릿한 불빛이 어둠 속에서 나를 애타게 잡아당긴다. 핸드폰 액정 너머로 번지는 부고 알림 문자 메시지다.


눈물에 젖은 남겨진 자들의 차디찬 밤이, 내 꿈속에 고스란히 채색된다.


노련한 전공이 되겠다는 꿈을 다짐하게 한 아름다운 밤이 있었다. 군 입대하고 처음 맞는 겨울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밤하늘에 펼쳐진 크리스마스 점등식의 그 화려한 불빛은 아직도 내 눈동자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날 이후로 내 인생은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감히 장담한다. 어쨌든 나는 꿈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되짚어 봐도, 나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식은땀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고층아파트에 매달려 페인트칠을 하던 아버지는 밧줄이 끊어져 추락사하셨다. 그러고 석 달 뒤에 내가 태어났다.


졸지에 다섯 남매의 막내가 되어버린 나에게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찌 된 게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말더듬을 물려받았냐며 탄식을 하셨다. 그것도 유일하게 말이다.


내가 태어나고 우리 집은 한마디로 몰락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돈을 벌어야 했고, 형 누나들은 배고픔에 일찌감치 집을 나가 일터로 갔다.


말더듬이라고 놀려대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기술이라도 배워야 먹고 산다며 나를 설득했다. 바닥을 기는 성적에다 집안 형편도 말이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기어코 나를 공고에 입학시켰다.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어디를 가든 골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학교생활이야 어떻게든 넘어가기 마련이지만, 군대는 아니었다.


막힌 변기.


중대 배치되고 한 달도 되기 전에 중대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아니, 별명이 아니라 그게 나 스스로도 더 친근한 내 이름이 되어갔다. 중대 고참들은 축구도 못하는 어리바리한 말더듬이 이등병을 개밥의 도토리 보듯 쳐다봤다.


시간이 지나자 그 시선은 노골적인 불길함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미 '막힌 변기'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암기사항 점검이 그 시작이었다. 그건 머리도 입술도 더듬는 나에게는 치명적인 형틀이었다. 군인의 길, 병의 임무, 근무 수칙···. 머릿속에 쑤셔 넣은 단어들은 하나같이 목구멍에서부터 뒤엉키다가 멈추섰다.


그러다, 보초 건수까지 내고 말았다. 첫 보초, 새벽 2시. 순찰하는 일직사관이 다가오자 긴장한 바람에 말을 더듬다 멈추었고, 순찰자는 어느새 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정적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당연한 결과를 받아 들고는 거국적인 호들갑을 떨었다.


불행은 마치 도미노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사실도 금세 깨닫게 되었다. 철저한 연대의식이 그것이었다. 나로 인해 죄 없는 동기들까지 싸잡아 욕을 들어야 했다.


절망이란 단어와 탈영하는 방법을 밤마다 눈물로 더듬어 찾았다. 부대 담을 넘는 탈영은 겁이 나서 체념했고, 첫 휴가를 나가서 잠적하는 것은 그때까지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


그럼, 하나밖에 없다. 이 지독한 곳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나란 인간은 그만한 사고 칠 인물도 아니었다. 영리한 중대원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제발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걸레질을 했고, 모두가 담배 일발 장전을 외칠 때 담배꽁초를 주웠다.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나라는 존재를 들킬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군대의 진리를 정말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등병의 시계는 고장 난 변기 속의 물처럼 제자리를 맴돌며 너무도 더디게 돌아갔다.


벗어날 수 없는 차가운 눈길들이 지치지 않고 나를 노리고 있었다. 상병 이하의 실질적인 군기담당, 식기당번들이 중대 최고의 고문관을 그냥 둘 리가 있겠는가. 그들은 끼니때마다 나의 암기상태와 그날그날 있었던 사소한 건수까지 국가안보적 차원의 문제로 승화시켜서는 동기들까지 싸잡아 윽박질렀다.


그들이 거머쥔 최고의 권한, 식사시간도 대폭 단축해 버렸다. 밥을 퍼서 식탁에 제대로 앉아서 먹은 기억이라고는 대기병일 때가 다였다. 배가 고팠다. 그렇지만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소리는 식사집합 구령이었다.


그 소리에 뒷걸음질 쳐 화장실에 숨었다. 떨리는 주먹으로 제멋대로 뛰는 멍청한 심장을 내려치며 소리 없이 울부짖은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막힌 변기.


절묘한 별명, 아니 내 이름이다. 그들은 내가 빠진 사실을 이내 알아챌 것이다. 변기를 뒤로 하고 식사집합 대열 마지막 줄에 합류한다.


출구를 잃어버린 절망, 다시 온몸으로 그걸 느낀다.


어떠한 희망의 싹도 용납하지 않는, 메마르고 삭아버린 이 퍼석한 땅에도 매서운 찬바람은 불어왔다. 12월로 접어들자 부대 전체가 긴장된 분주함에 휩싸였다. 매년 1월 중순께, 부대 전체가 임진강으로 이동하는 제법 큰 규모의 혹한기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장들은 귀찮아했고 상병들은 두려워했다. 중대 단위 전투검열을 겸해, 중대마다 치열한 신경전까지 펼치며 교육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훈련에 투입될 장비와 자재 정비로 야간작업뿐만 아니라 일요일에도 야적장으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투자재 정비가 한창인 자재야적장은 고참들에겐 간부의 눈을 피해 노닥거리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녹이 슨 장비를 둘러싼 찌든 먼지와 녹을 걷어내고 국방색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은,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아 나로서도 마음이 편해 좋았다. 나는 철브러시와 그라인더로 녹 제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고참들이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오늘 저녁 메인 반찬으로 나올 닭튀김에 얽힌 이야기에 열중하던, 바로 그때였다.


중대장 전령이 다급하게 야적장으로 뛰어왔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숨찬 전령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간파한 고참들은 몹쓸 물건을 내던지듯 피던 담배를 내동댕이쳤다.


"중대장님이, 노종호 이병을 찾으십니다."


"종호를...?"


중대장이 찾는 사람이 나란 사실에, 겨울바람을 미처 피하지 못한 곰의 무리처럼 움츠린 중대원들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전령에게 시선을 모았다.


"예! 단본부에서 노종호 이병을 긴급 호출한다는 공문이 중대본부에 왔습니다."


"단본부에서 종호를 왜 찾아?"


"이유는 모릅니다. 대개는 공문에 호출경위가 구체적으로 기재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중대본부가 비상입니다."


무거운 침묵과 어두운 시선이 나에게 몰렸다. 모두가 불길한 징조를 절감하는 눈치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중대원들을 장악한 이 지독한 한기가 나로 인해 번져간다는 공포에 휩싸이며 어깨가 심하게 떨려왔다.


그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제대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이 병장이었다.


"종호야, 너 뭐 든든한 빽이라도 있냐?"


기막히게 정다운 속삭임에 나는 더욱 긴장하고 말았다.


"어, 업, 없습니다."


"그럼, 지난주 소원수리 적을 때..."


"뭐, 뭐든지, 꼭, 꼭, 적어야, 된, 다고, 해, 해서, 된, 된장국이, 좀 짜, 짜, 짜다고만, 저 적었습니다."


애써 참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삐져나왔다. 이 병장은 나의 경직된 어깨를 다독거리며 달래듯 말을 이었다.


"종호야, 네가 워낙 순진하고 아직 세상 물정에 서툴러서 이런저런 고통을 겪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게 힘들 거다. 나도 말이다, 너처럼 이등병 때 매일 탈영하는 꿈을 꾸었다. 그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제대가 며칠 남지 않았잖아. 금방이다. 혹한기 훈련 끝나면 일병 진급하지, 그럼 바로 정기 휴가다. 군 생활이 다 그런 거야. 그리고 말이야, 중대장이나 상급부대에서 우리 생활을 세세히 알아서 좋을 게 없어. 달콤한 말들을 그럴싸하게 해대지만 어차피 군 생활은 우리끼리 하는 거잖아. 너도 머지않아 알게 되겠지만......"


중대장 전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 병장을 돌려세웠다.


"중대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중대본부에 들어서자, 묘한 미소의 중대장과 무심한 표정의 인사계 상사가 잔뜩 얼어있는 이등병을 어색하게 맞았다.


"노종호 이병, 단본부에서 자네를 찾는다더군."


중대장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위압적이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혹시 친척 중에 군에 계신 분은?"


"없, 없습니다."


중대장은 나의 신상명세서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학력, 가족관계, 특기사항. 별다른 게 없다는 듯 서류를 덮었다. 인사계 상사는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노 이병, 자네 군 생활 어떤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목이 메었다.


"괜, 괜찮습니다."


중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금 전, 이 병장이 들려준 내용과 별 다른 건 없었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는 것, 상급부대에서 괜히 관심 가지면 중대 전체가 피곤해진다는 것.


"단본부 가서는 아무 말 말고, 물어보는 것만 짧게 대답해.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중대본부를 나설 때, 감히 눈도 마주치기 힘들었던 중대장의 눈빛에 시원찮은 여운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중대본부에서 단본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12월의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부대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을 오르는데,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종호야, 너 말 더듬는 걸 군대 가서 잘 이야기해 보기라. 군대도 사람 사는 덴데 배려를 해주지 않겠나."


입대 전날 밤,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배려는커녕 놀림감이 되었고, 암기상황 점검은 유독 나에게만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막힌 변기.'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단본부 입구의 넓은 정원은 이국적인 정취로 홀로 등장한 초췌한 이등병을 그럴싸하게 맞아주었다. 겨울 채비가 제대로 된 정원수와 잘 다듬은 잔디가 보기 좋게 펼쳐졌다. 불과 몇 걸음 되지 않는 저 아래와 다른, 위엄과 평온한 기온에 압도된 발걸음이 단본부 입구의 묵직한 유리문 앞에 멈추었다.


다림질 자국 없는 군복의 지친 몰골이 유리에 투명하게 비쳤다. 그 뒤로 환영처럼 수많은 시선이 내 앞을 가로막고 비켜주지 않았다. "막힌 변기 때문에 우리까지 욕먹는다"며 주먹을 휘두르던 식기 당번들. 나 때문에 밥도 못 먹고 기합을 받던 동기들. 그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 나오는 보초 건수에 비상이 걸렸던 중대원들의 일그러진 얼굴.


조금 전, 내 멍투성이 정강이를 보며 경악하던 중대장의 얼굴도 스쳤다. "이게 뭐냐! 이런 식으로 관리했어!"라고 상사에게 고함치던 그의 목소리.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막힌 변기의 멍투성이를 조심스레 살피는 인사계 상사. 모른 척했던, 아니 모를 수밖에 없었던 그의 눈빛.


그들은 무엇을 그리도 두려워하는 걸까. 이 커다란 유리문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겪고 있는 치욕의 나날들을 알고 있다며 보호해 주고 밥을 실컷 먹게 해주려고 하는 걸까. 집요하게 나와 동기들을 괴롭힌 식기당번들을 영창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걸까.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다. 어차피, 내, 내가... 말을 더듬어 아무것도 제대로 말하지 못해서 생긴 일들이다. 혹여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면 또 중대원들이 피해를 보고, 식기당번들의 눈빛은 더 험악해질 것이다.


손이 떨렸다. 유리문 손잡이가 차갑게 느껴졌다.


단본부 행정실의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까지 머릿속은 끝없는 의문과 상념의 고리에 사로 잡혀 있었다. 하지만 심하게 뛰는 가슴은 이미 결심을 내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괜찮다고, 아무 문제없다고.'

그게 나를 위한 것인지, 중대원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모든 걸 포기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널찍한 단본부 행정실은 사무용 책상으로 진지를 구축한 듯, 제일 안쪽의 넓은 책상을 중심으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따뜻한 난방이 돌았다. 중대 막사와는 다른 세상이었다. 깨끗한 책상 위로 서류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고, 벽에는 각종 훈령과 포스터들이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


타자기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몇몇 행정병들이 서류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군복은 다림질이 반듯했고,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다.


길 잃은 강아지처럼 두리번거리는 나를 발견한 맨 앞자리의 상병은 전투중대의 어수룩한 이등병을 한눈에 알아챘다.


"1대대 3중대에서 왔지?"


"네, 그, 그렇습니다."


"저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어."


상병은 다시 타자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소리가 긴장된 심장 박동과 겹쳤다.


나는 구석의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기대지도 못하고,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은 땀으로 젖어갔다.


시선은 전방 15도를 유지했다. 어깨를 펴고 가볍게 쥔 주먹을 무릎에 가지런히 올렸다. 벽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10분이 지났을까, 아니 30분쯤 됐을까. 시간의 감각이 사라졌다. 행정실의 10명이 넘는 행정병 중 그 누구 하나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자세는 조금씩 흐트러졌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 행정실을 둘러보는 여유마저 누려보았다. 검은 뿔테 안경의 이등병이 눈에 띄었다.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일해 온 사무원처럼 자신의 일에 편안하게 몰입해 있었다. 능숙하게 타자를 치는 그의 샛노란 이등병 계급장이 오히려 어색해 보였다. 같은 이등병인데 저렇게 다를 수 있구나.


그 옆 상병은 전화기를 귀에 대고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여유로운 표정,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내 시선을 끌었다.


커다란 유리창 아래 단행정본부장의 명패가 오후의 기울어진 햇살에 번들거려 눈에 거슬렸다. 명패 옆에는 많은 서류가 쌓여 있지만 그것과는 별 상관없다는 무료한 표정의 행정본부장은 검은 가죽의자에 폭 파묻혀 있었다. 낮잠이라도 잘 모양이다. 그의 묵직한 소령 계급장에 머문 눈길을 이내 돌렸다.


나에게 대기를 지시했던 상병이 하던 일을 다 마무리했는지 두꺼운 서류철을 덮었다. 그리고는 온몸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상병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어! 왔어. 데려가."


화들짝 놀라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 심장이 쿵쿵거렸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행정병들은 저녁 반찬으로 나올 닭튀김이 갈수록 부실해진다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휴식시간을 만들어나갔다.


닭튀김이란 말을 듣는 순간, 악몽 같은 식기당번들과의 대면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오늘 점심때 그랬지, 저녁에 5분 대기 수칙을 중점적으로 체크한다고...'


저녁식사 집합까지는 불과 2시간도 남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다시 되뇌기 시작했다.

'5분 대기조는 적의 기습공격에 대비, 즉각 전투태세를 갖추어...'

완벽하다. 다시 한번.

'5분 대기조는...'


수십 번도 더 외웠었다. 꿈에서도 외웠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식기당번의 살기 넘치는 눈빛 앞에 서면, 첫 단어부터 목구멍에서 막힌다.

"오, 오, 오분..."

그러면 주먹이 날아온다. 나는 온몸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문다. 동기들까지 함께 벌을 받는다. 나는 그저 막힌 변기에 불과했다.


시간은 반복되는 잡념들로 뒤엉켜버렸다. 답답한 가슴에 긴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군복 바지에 몇 번이나 훔쳐냈다.

'누가 나를 찾는 걸까. 왜 나를...'


겨우 머릿속을 추스르고 5분 대기조의 임무를 다시 되씹을 때였다. 행정실 출입문이 마침내 열렸다. 말쑥한 용모의 상병이 행정실로 성큼 들어왔다.


"단결. 상병 김 베드로. 용무 있어 왔습니다."


특별한 이름에 나는 그를 더 유심히 쳐다봤다. 명찰 위에 오버로크 된 하얀 십자가가 그의 이름과 보직을 대신 설명해 주는 듯했다. 선한 인상이지만 눈매가 야무져 보였다.


그의 등장으로 행정실 분위기는 일순 바뀌었다. 잽싸게 자세를 바로잡은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고, 농담조의 말을 능숙하게 주고받았다.


"베드로 형제님, 크리스마스 준비는 잘 되어갑니까?"


그는 모두에게 환한 미소로 답했다. 형제님이라니. 상병이 행정병들에게 형제님 소리를 듣다니.


"이제, 점등식 준비만 남았습니다. 다들 관심을 많이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그보다 더 놀라운 광경은 활기찬 얼굴로 책상에 두 팔꿈치를 세우며 상병을 주시하는 소령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후의 나른함에 취해있던 소령은 어느새 활력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행정실을 장악했다.


"김 상병, 안 그래도 연락할 참이었어. 이번 크리스마스 점등식에 군악대를 확보했어. 크리스마스이브는 일정이 너무 많아서 안되고, 크리스마스에 일정을 겨우 잡았어."


"할렐루야! 정말 감사드립니다. 크리스마스에 점등식 일정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소령은 김 상병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군악대 담당 장교가 김 상병의 대학 동문 선배라 일이 쉽게 풀린 것 같아. 김 상병이 구상하고 있는 점등식의 취지를 설명했더니 일정을 잡아 주더라고. 자네에 대한 칭찬이 끝이 없더군."


"그것보다도 집사님의 믿음과 관심에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소령은 흐뭇한 미소를 금세 접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진지한 어조였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어. 김 상병이 단장님을 크리스마스 점등식에 초대한 건, 강건한 믿음과 진정한 용기가 있지 않고서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종교 활동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단장님 아니셨나. 크리스마스 점등식 행사를 계기로 하나님의 복음을 단장님에게도 전하겠다는 김 상병의 큰 믿음이야말로 종교를 가진 장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어."


"하나님의 깊은 뜻입니다. 무관심 속에 교회는 낡을 대로 낡았고, 우리들만의 정체된 예배에 근심 어린 하나님의 핀잔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데, 어찌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김 상병의 구상대로 이번 크리스마스 점등식을 계기로 교회 재건축을 단장님에게 건의할 생각이야. 우리 행정실뿐만 아니라 뜻있는 장교들도 큰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야."


"크리스마스 점등식을 위해 제가 사회에서 몸담고 있던 교회의 대학부 성가대가 봉사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방문절차를 부탁드립니다."


행정병들이 일제히 환호를 내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 어깨가 움찔거렸다. 소령 바로 앞자리의 병장이 무언가에 홀린 눈빛으로 김 상병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대학부라면 어여쁜 자매님들도 당연히 있겠지?"


"이봐, 안 병장. 지금 그런 이야기가 중요한가."


병장은 소령의 어색한 눈치에 오히려 더 흥이 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 낭송이라도 하듯 그럴싸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잡았다.


"상상해 보십시오! 고요하고 거룩한 밤. 화려하고 따스한 불빛이 춥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아름다운 천사의 찬양소리가 울려 퍼진다면, 제 아무리 굳게 닫혀 있는 단장님의 마음이라도 활짝 열고 말 겁니다."


행정실은 금세 웃음바다가 되었다. 소령은 이윽고 구석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또 다른 선물을 감춰둔 넉넉한 산타의 표정으로 김 상병을 환하게 바라봤다.


"김 상병이 부탁한 사병이야. 우리 부대에서 유일하게 전기공사 기능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더군."


"교회가 낡은 목조 건물이라 아무래도 전기를 잘 다루는 일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투중대에서 파견근무로 돌리는 것은 규정상 힘들지만, 이번 행사는 사안이 중요한 만큼 힘을 모아야지. 내무생활에 지장 없도록 작업 시간 잘 조정해야 하는 것, 잊지 말고."


어색하기만 한 이 분위기와 이해하기 힘든 이들의 대화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기억을 되찾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부에 지지리도 소질이 없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의 바람대로 자격증 하나만은 꼭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필기 전형에서 번번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실업계 재학생에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필기 면제 기회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김 베드로 상병을 따라 부대 중앙도로를 걸었다. 벌겋게 물들어 가는 연병장 너머 겨울하늘이, 웬일인지 따스하고 평안하게 느껴졌다. 1대대 막사를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언덕에 다다르자 빛바랜 하얀 페인트가 어울리는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십자가를 받치는 낡은 철재 탑이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아늑하게 보였다.


교회 바로 뒤편에는 장교식당과 테니스장이 있었다. 그 너머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택마을의 여러 색 지붕들은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김 상병은 교회 바로 옆 작은 막사로 나를 데려갔다. 아담한 공간에 소파와 테이블, 많은 책들이 수납된 책장이 배치되어 있었다. 작은 창문 너머로 햇살이 들어왔다.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그림 한 장이 나의 눈과 가슴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한 마리 어린양을 품에 안은 선한 목자가 있다. 문득,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설렘이 선한 목자의 품에 안긴 저 어린양의 것 같았다.


"우리 둘이 준비하기엔 좀 벅찬 감이 있지만, 혹한기 훈련 준비로 부대 전체가 비상이라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지만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바로 노종호 이병이라는 사실만으로 점등식 준비가 끝난 기분이다."


김 상병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교인들만 모여 치른 예전의 크리스마스 행사와는 달라. 올해는 단장님을 비롯해 부대 주요 인사들과 가족들이 모두 참여하는 중대한 행사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정성껏 준비해야 돼. 이번 크리스마스 점등식을 우리 부대 역사상 최고의 이벤트로 길이 남도록 하고 싶어."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종호야, 넌 오늘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이등병이 아닌 나의 동료이자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란다. 나는 너의 조수가 되어 열심히 도울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목소리인가.

동료. 일꾼.


막힌 변기도, 골칫거리도, 고문관도 아닌, 동료. 나 스스로 놀랄 만한 자신감과 힘이 솟아올랐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 상병은 여태껏 보아온 내 주변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처럼 편안하고 다정하게 나를 대해주었다. 계급장도, 말더듬도,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 상병은 일과시간에 맞춰 중대본부로 복귀시켜 주었다. 묵직한 긴장감에 휩싸였던 중대본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인사계 상사는 주번하사를 불러 나의 단본부 파견 근무를 지시했다.


"노종호 이병, 12월 25일까지 단본부 교회 점등식 준비작업에 파견한다."


덧붙여, 5분 대기조 명단에서 12월 마지막 주까지 제외시키라고 명령했다. 5분 대기조 제외.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다음, 더 믿기지 않는 기적이 식당 입구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식기당번들은 우리 동기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암기사항 점검도, 윽박지르는 소리도 없었다. 그냥 식당으로 바로 입장시켰다.


식사시간을 제한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밥을 먹었다. 동기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눈빛에도 놀라움과 안도가 가득했다. 국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밥을 먹어본 게 얼마 만인가. 살점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붙어 있지 않은 앙상한 닭 뼈를 잔반통에 부었다.


배가 불렀다.


그날 밤, 침상에 누워 하루를 되짚었다. 단본부 호출, 김 베드로 상병, 크리스마스 점등식, 파견근무, 5분 대기조 제외.


꿈인가 싶었다. 아니,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현실이 된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탈영을 꿈꾸던 내가, 오늘은 내일이 기다려진다.


감사했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몰랐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감사가 흘러나왔다.


달콤한 꿈을 꾸었다. 김 상병의 자상한 얼굴, 그의 여유로운 미소와 다정다감한 말투. 화려한 점등식의 그날, 나는 김 상병과 나란히 서서 주인공이 되었다. 밤하늘에 불빛이 쏟아지고, 군악대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꿈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기분이 달랐다. 기상나팔 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세면장에서 동기들이 물었다.


"종호야, 너 파견근무 간다면서. 진짜야?"


"응, 응."


"5분 대기조도 빠진 거 맞아?"


"그, 그래."


동기들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뿌듯했다.


아침을 배불리 먹고 교회로 향했다. 단독 군장으로 연병장을 향하는 무거운 군화 발자국 소리에서 벗어나듯, 나는 언덕길을 한 마리 제비가 되어 날아올랐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언덕 위 교회가 보였다. 빛바랜 하얀 페인트, 낡은 철재 십자가 탑. 어제와 똑같은 풍경인데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따뜻하고,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김 상병은 엄숙한 기도로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께 알렸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기도하는 법을 몰랐지만, 그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감사합니다.'


커피 향이 아담한 막사 공간을 채워 나갈 때쯤, 김 상병은 나에게도 커피 한잔을 내밀었다.


"자, 종호야. 커피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


커피를 받아 들었다. 처음 마셔 보는 커피였다.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감싸니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김 상병은 커피를 마시며 점등식 준비의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점등식은 커다란 스위치가 설치된 점등탁자를 중심으로 행사가 진행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단장님이 스위치를 누르면 십자가 철탑을 타고 치솟아 오른 불빛이 교회 주변과 교회 앞 잔디마당으로 쏟아져 내리며 화려한 장관을 펼칠 거야."


상상이 되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불빛이 쏟아지는 모습.


"이때 군악대 팡파르가 울려 퍼지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와 동시에 교회 건물을 따라 전구들이 차분하게 빛나고, 마지막으로 교회 입구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게 빛날 거야."


눈앞에 그려졌다. 그 화려한 장면이.


"이렇게 모든 조명이 밤하늘을 장식하는 순간, 군악대의 반주로 내가 초대한 성가대의 찬양이 아기예수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는 거지."


김 상병의 목소리가 그려주는 크리스마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만드는 일에 내가 함께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전기배선 도면을 작성하고 준비할 자재들을 꼼꼼히 기록했다. 김 상병은 나의 답답한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격려했고, 인정해 주었다. 비웃음거리였던 말다듬이를.


김 상병은 신속하게 자재들을 공급해 주었고 나는 심혈을 기울여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굵고 가는 전선을 용도와 길이에 맞추어 절단했다. 싹둑싹둑, 절단기 소리가 경쾌했다. 소켓을 연결하고 절연테이프를 꼼꼼히 감았다. 손끝에서 테이프가 빠르게 풀려나가며 배선을 감쌌다.


나는 계획한 순서대로 완성하고, 다시 하나하나 세심히 점검했다. 사다리를 타고 교회 지붕과 십자가 탑을 오르내렸다. 십자가 탑 위에서 내려다본 부대 전경은 장관이었다. 저 아래 연병장에서 훈련받는 중대원들, 중대 막사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지만 가슴은 뜨거웠다.


전구가 주렁주렁 달린 배선을 설치해 나갔다. 차가운 칼바람에 손이 시려도 마음은 훈훈하고 행복하기만 했다.


김 상병은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종호야, 정말 잘하고 있어.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재능이야."


"아, 아멘!"


나의 힘찬 아멘 소리에 김 상병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휴식시간을 정해 교회 막사의 난로 곁에서 마음 편히 쉬게 해 주었다. 점심은 교회 뒤편의 장교식당에서 배불리 먹었고, 교인 가족들이 간간이 들러 따뜻한 격려와 함께 간식거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틈틈이, 김 상병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찌, 예수를 모르고 크리스마스를 모르겠는가. 하지만 김 상병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격이 달랐다.


"종호야,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이지는 알지?"


"예, 예수님, 태, 태어난, 날입니다."


"그래, 맞아. 그런데 그분이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알지!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잖아.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거지."


김 상병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그분은 평생 낮은 곳에 계셨어.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셨지. 그러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어."


김 상병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피의 대가로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거야."


"기, 기도하면, 들어주, 주시나요?"


"나의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다 들어주셨어. 그래서 점등식에 단장님도 오시고, 군악대에 성가대까지 오게 된 거야. 종호도 여기에 온 거잖아."


나는 김 상병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설교 같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친구의 이야기처럼 다정하고 편안했다. 그 어떤 깊은 진리보다, 나는 김 상병이 좋았다. 그리고 말을 너무 잘하는 김 상병이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그와 함께 있으면 세상이 달라 보였다. 막힌 변기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는 기분.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잠을 설쳤다. 밤새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겨우 든 잠 속에서, 낡아서 곧 쓰러질 것만 같은 마구간을 보았다. 마구간 안은 어두웠다. 짚더미 냄새와 가축들의 체취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말구유에는 갓 태어난 아기가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갔다. 어느새 나는 군중 속에 있었다. 그를 보았다. 성난 군중들이 그를 죽이라고 외쳐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채찍에 찢긴 그의 등과 옆구리. 가시면류관으로 피투성이가 된 얼굴. 손과 발에 못이 박혔다. 쿵. 쿵. 망치 소리가 울렸다. 피 흘린 뒤 찾아오는 지독한 한기. 몸 한 번 제대로 움츠리지 못하고 그는 힘겹게 죽어갔다.


잠에서 깨어 다시 몸을 뒤척였다.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이 기적 같은 생활이 크리스마스가 되면 모두 사라진다. 다시 중대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식기당번들 앞에 서야 한다. 다시 막힌 변기가 되어야 한다. 김 상병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무릎 끓고 기도했다.


"하, 하나님! 크, 크리스마스가, 오, 오지 않게, 해, 해 주십시오. 제, 제발. 제발."


눈물이 베개를 적셔갔다.



김 상병은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황금색 점등스위치를 나에게 내밀었다.


"종호야, 이 스위치만 설치하면 점등식 준비는 완성이다."


황금빛 스위치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손이 떨렸다. 교회 앞 잔디마당에 테이블을 꺼내 고급 벨벳 천을 덮고 스위치를 고정시켰다.


크리스마스 점등식이 단 하루 남았다.


내일 저녁 8시, 화려한 점등식이 펼쳐진다. 점심을 먹고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마무리한 다음, 최종점검에 들어가기로 했다. 김 상병은 분주하게 오가느라 나와 눈을 마주칠 시간조차 없었다. 성가대 부대 출입허가 확인, 군악대와 마지막 조율, 단장님 일정 재확인, 예배당 장식과 청소까지 일은 끝없이 이어졌다.


자잘하게 남은 잡일은 황금 같은 시간을 순식간에 삼켰고,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낡은 나무 상자 안의 두꺼비집에 주전원을 연결했다.


김 상병과 나는 점등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자, 종호야. 이제 확인해 보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얼굴이 경직될 정도로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난생처음이었다.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해낸 것이. 그 벅찬 감격이 감당하기 어려운 긴장감으로 온몸을 감싸 안았다.


김 상병이 없었다면 이 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김 상병이 점등스위치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우리 두 사람은 바위덩어리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무것도 켜지지 않았다.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빛마저도 없었다.


"이상하네..."


김 상병이 당황한 표정으로 스위치를 다시 눌렀다.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종호야, 두꺼비집 확인해 봐."


나는 두꺼비집으로 달려갔다. 넓적한 퓨즈 중간이 뭉텅 녹아내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번졌다.


"퓨, 퓨즈가 끊, 끊어졌습니다."


"괜찮아. 퓨즈가 오래되어 그럴 수도 있어. 교회 건물이 워낙 낡았잖아. 예비 퓨즈가 있을 거야. 교회 막사 공구함을 뒤져봐."


김 상병의 목소리는 나를 달래듯 침착했다. 애타게 공구함을 뒤졌다. 3개의 퓨즈를 찾았다. 첫 번째 퓨즈를 갈고 스위치를 눌렀다. 퓨즈는 물에 풀린 휴지처럼 힘없이 녹아내렸다.


"또, 또 끊어, 졌습니다."


"뭐?"


김 상병의 목소리에 긴장이 서렸다.


"다시 해봐."


두 번째 퓨즈. 역시 똑같았다. 김 상병의 얼굴이 굳어졌다.


"빨리 원인을 찾아야 해."


마지막 퓨즈를 갈아 끼우려는 나에게 김 상병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퓨즈만 갈지 말고 원인부터 찾으라고!"


점등스위치에 전선을 연결하다 손을 베었었다.

'맞아, 그래서 전선 고정 나사를 엉성하게 조였을지도 몰라.'


잔디마당 중앙에 설치된 점등탁자를 향해 뛰었다. 제발, 제발, 제발. 머릿속엔 그 애절한 바람만이 숨 가쁘게 맴돌았다.


잔디마당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묵직한 힘에 발목이 잡혔다. 잔디마당 가장자리에 설치된 녹색 철근을 반달 모양으로 쳐놓은 낮은 울타리에 발이 걸린 것이다.


거칠게 넘어지고 말았다. 공구를 들고 있는 오른손이 접히면서 어깨까지 뜨거운 전율이 흘렀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스위치로 달려가 덮개를 열려고 오른손을 뻗는 순간, 강한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솟구쳐 올랐다. 고통과 긴장에서 떨리는 두 손으로 겨우 덮개를 열었다.


전선은 너무도 단정히 자기 자리에 잘 고정되어 있었다. 머릿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김 상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치며 달려왔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정신 바짝 차리고 원인을 찾아!"


"김, 김, 상병님. 전, 전구에 무, 문제가..."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전구에 문제가 있다니."


김 상병의 어이없다는 표정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메추리알만 한 전구를 다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가지런히 포장된 전구 꾸러미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못한 잘못을 탓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온갖 궁리를 쥐어짜는 동안에도 오른팔을 넘어 어깨까지 번져가는 통증이 머릿속을 잔인하게 헤집고 들어왔다.


"그렇게 넋 놓고 있으면 어떡해. 점등식이 바로 내일이야."


김 상병이 베풀어준 그 사랑에 꼭 보답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김 상병의 아름다운 구상을 내가 이렇게 망쳐놓는 것은 아닌지, 너무도 두렵고 불안했다.


'그래, 이건 말도 안 된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학교 수업시간에 더 열심히 들었다면 능수능란하게 해결할 수도 있었을 건데. 도대체 나란 인간은...'


통증과 막막함으로 땀에 젖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짙은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번쩍였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래... 불량 전구의 스파크가 보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는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걸 찾으면 된다.'


뜨거운 통증을 목구멍으로 집어삼키며 스위치 앞에 섰다. 서쪽 하늘로 햇살이 사라지고, 교회 주변은 벌건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나에게 다가오는 김 상병의 굳은 얼굴이 차가워 보였다.


"김, 김 상병님. 퓨, 퓨즈가 끊,어질 정도면, 합, 합선된 불, 불량전구, 입니다. 어, 어두워지면, 그 전, 전구의, 스, 스, 스파크가 보일..."


김 상병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 말을 막았다.


"스파크? 어둠 속에서 불량전구의 스파크를 찾겠다고?"


그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고 분명한 기술적인 방법을 제시하란 말이다. 순간적으로 번쩍이다 사라지는 스파크를 무슨 재주로 찾아. 수백 개 전구 중에서 어떻게 찾는단 말이야. 퓨즈도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는... 어둠 속에서는 그 짧은 순간도 보일 겁니다. 분명히 보입니다.'


하지만 말은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김 상병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이건 말이 안 돼. 도면대로 했잖아. 네가 확인했다며?"


"예, 예. 확, 확인, 했습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김 상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시 후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단본부 사람들한테... 행정실 형제들한테 뭐라고 말해. 내가 얼마나 자신 있게 이야기했는데."


그가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김 상병은 다른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어둑해져 가는 교회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내일 아침에 외부에서 전기기술자를 데려와야겠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종호야, 너도 알겠지만..."


김 상병이 한숨을 쉬었다.


"이건 내게 정말 중요한 일이야. 점등식 준비하면서 단본부를 얼마나 들락거렸는지 너도 알잖아. 행정실 형제들한테, 소령님한테, 단장님한테까지 얼마나 자신 있게 말했는데."


그가 내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이제 와서 실패했다고 하면,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 너는 중대에 복귀하면 끝이겠지만, 이 점등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야 해."


나는 김 상병에게 다가갔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어둠 속에서 빛이 보인다고. 스파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말은 목구멍에서 맴돌았고 자꾸 눈물이 났다. 어깨를 움켜쥔 통증보다 더 심한 자책감이 내 심장을 압박해 들어왔다.


김 상병이 나를 쳐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지쳐버린 실망감이 가득했다.


"종호야..."


그가 한숨을 쉬었다.


"넌 최선을 다했어. 나도 안다. 근데 이젠... 이젠 안 되겠어."


김 상병의 목소리가 명령조로 말했다.


"중대로 돌아가. 내일 아침 일찍 기술자를 부를 테니까."


"김, 김 상병님, 저, 저, 정말로..."


"됐어!"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정을 억누른 듯 단호했다.


"이, 이제, 곧, 어, 어두, 어두워지..."


"말 더듬거리지 말고 그냥 가. 답답해 미치겠다."


그의 두 손이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반사적으로 팔을 뒤로 뻗다가 점등스위치를 눌러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퓨즈가 끊어졌다.


두꺼비집을 확인한 김 상병이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돌아봤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어서 가라고! 중대로 돌아가!"


김 상병의 화난 목소리가 떨렸다.


"중대에서 왜... 왜 널 막힌 변기라고 부르는지 이제 알겠다."


교회 언덕을 내려오는 데 눈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발걸음을 멈추고 흐느꼈다.


"막힌 변기..."


김 상병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맞다! 나는 항상 그랬다. 학교에서도, 중대에서도, 어디서나 실패했다.


크리스마스가 오면 모든 게 사라진다고 생각했었다. 어젯밤 꿈속에서도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멍청하고 비겁했다. 나는 점등식보다 다시 막힌 변기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만을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김 상병이 내일 전기 기술자를 데리고 오면 아마도 간단하게 고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정말로 막힌 변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언덕길 아래에 주저앉았다. 전기공사 기능사 자격증을 땄을 때, 학교 화장실에 숨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린 그 순간을 떠올렸다. 내 손으로 해냈던 그날.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다. 이 기적의 시작이었다. 중대에 돌아가 막힌 변기가 되더라도 내 자격증마저 그렇게 만들 수 없다.


김 상병은 믿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스파크가 보인다는 걸. 어둠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걸.


도망치지 않겠다. 나는 지금 간절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다. 화려하게 빛나는 점등식을 보고 싶다. 이건 나의, 나의 크리스마스다. 나의 크리스마스 점등식은 이제 시작이다. 퓨즈를 찾아야 한다. 퓨즈를.


중대본부 상황실로 곧장 뛰어갔다. 주번하사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종호야, 어디 아프냐? 뭔 땀을 그렇게 흘려."


"퓨, 퓨, 퓨즈가 필, 필요, 합니다. 교, 교회에"


"퓨즈가 어디 있다고."


"청, 청소 하, 하다가 봐, 봤습니다."


보급계 책상 옆 공구함에 있는 퓨즈를 몽땅 꺼내 들고 상황실을 나왔다. 주번하사는 교회로 간다는 나를 내버려 두었다.


어둠에 휩싸인 언덕을 뛰어올랐다. 끔찍한 통증이 번졌고, 비 오듯 땀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퓨즈를 교체했다. 점등스위치를 눌렀다.


순간, 분명히 보았다. '스파크다.'


교회 두 번째 창문 아래 귀퉁이, 그곳에서 작은 불빛이 번쩍하고 사라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동자에 선명하게 남았다.


'불량전구다. 바로 저기!'


어둠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오른팔의 통증을 잊으려 이를 악물고 새 전구로 교체했다. 다시 퓨즈를 교체하고 점등스위치 앞으로 달려갔다.


'제발... 제발...'


손을 뻗어 스위치를 눌렀다. 칠흑 같은 어둠이 한순간 사라졌다.


교회 주변을 가득 채운 화려한 불빛. 십자가 철탑을 타고 치솟은 빛이 꼭대기에서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교회 건물을 따라 그려진 따뜻한 불빛들. 크리스마스트리의 화려한 장식조명.


성공했다.


김 상병이 막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걸음을 멈춘 김 상병이 고개를 들어 교회를 바라봤다.



깊은 밤. 아스라한 불빛, 마구간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은 눈에 반짝이는 눈물을 보았다. 떨리는 손이 아기의 눈물에 닿았다. 아픔은 사라졌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른 새벽, 불침번이 거친 숨소리와 식은땀에 흠뻑 젖은 나를 발견했다. 그는 일직사관에게 연락했다.


나는 의식을 잃은 채 의무실로 옮겨졌다. 정오의 밝은 햇살에 눈을 떴다. 심각한 표정의 의무장교가 다가왔다. 오른쪽 팔목 골절과 인대 파열, 거기에 쇼크가 겹쳤다는 진단이었다. 의무장교는 내 몸 전체를 살폈고 구타 흔적을 발견했다. 이 부상도 그와 관련이 있다며 신고하겠다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의무장교가 의무실을 나가자 의무병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너희 중대 몇 명 영창 가게 생겼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라 내일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될 거다. 두어 달 있다가 오면 정기휴가 가고. 그러면 잠잠해질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니까 조사받을 때 있는 그대로 말해."


저녁 TV 시청시간에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바람이 차다. 부대 중앙도로를 걸어갔다. 1대대 막사 앞을 막 지날 때였다.


언덕 위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어두운 밤하늘에 펼쳐졌다. 성가대의 합창 소리가 들렸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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