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박물관] 에필로그 3

9화. 진화, 희망을 보다.

by 구현

더 이상 멸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진정한 나의 삶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모든 것들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훌쩍 자라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의 삶은 작은 변화들로 가득 채워져 갔다.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다양한 체험을 하며, 과거 술자리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가족과의 추억으로 채웠다. 접대 위주의 영업보다는 품질의 전문성을 키웠고, 그 진정성으로 거래처와의 관계를 새롭게 구축해 나갔다. 그렇게 제일기업과 진행했던 품질향상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부장으로 승진했다. 과거의 나라면 승진 축하라며 밤새 술을 마셨을 테지만, 이제는 집으로 달려가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 더 소중했다.


제일기업의 상장 기념식에서 부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최 부장, 덕분에 우리 회사가 이렇게 성장하는데 좋은 촉매제가 되었어.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았어. 이건 자네 가족에게 보내는 선물일세. 내가 자네의 시간을 많이 뺏었지."


부사장은 내 손에 런던 왕복 항공권과 호텔 숙박권이 담긴 봉투를 쥐여주었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과거, 술잔을 비우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멸종 위기에 처했던 지난날을 극복하고, 진심과 신뢰로 얻어낸 '진화'의 결실이었다.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런던 여행 소식을 전했을 때, 아이들의 환호성과 아내의 놀란 표정을 보며 나는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 시내로 향하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에 아이들은 연신 감탄사를 뱉어냈다. 큰 아이는 스마트폰으로 거리 풍경을 담느라 바빴고, 작은 아이는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신기한 듯 런던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 했다. 아내의 얼굴에도 설렘이 가득했다.


"여보, 정말 꿈같아. 우리가 이런 곳까지 와서 가족 여행을 하다니."


아내의 목소리에는 지난 세월의 어려움을 함께 버텨온 감격이 배어 있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의 정수를 담고 있는 런던 자연사박물관으로 향했다. 웅장한 외관에 아이들은 이미 입을 벌리고 있었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압도적인 크기의 푸른 고래 뼈대 '호프(Hope)'가 천장에 매달려 우리를 맞이했다. 실제 길이가 25.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뼈대는 마치 하늘을 헤엄치듯 우아하게 떠 있었다.


"와... 진짜 고래가 이렇게 큰 거야?" 작은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큰 아이도 평소의 무덤덤한 표정을 잊고 고개를 들어 호프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이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예전에 목포 자연사박물관에서 너희와 함께 본 고래 뼈대를 기억하니? 그때 아빠는 마음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어."


"어떤 생각이요?"


큰 아이가 물었다. 나는 잠시 호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아빠는 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거든. 마치 멸종위기에 처한 이 고래처럼 바다 깊은 곳에서 헤매고 있다고 느꼈어. 하지만 너희들과 엄마가 있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지."


아내가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끼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작은 아이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아빠가 우리한테 항상 박물관 가자고 했구나!"


"맞아. 너희와 함께 보는 것들이 아빠에게는 세상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거든."


우리는 한참 동안 호프 아래에 서서 저마다의 생각에 잠겼다. 26미터의 거대한 뼈대가 천장에서 우아하게 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 고래의 이름이 왜 '호프'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한때 멸종 위기에 처했던 고래들이 사람들의 보호 노력으로 다시 바다를 헤엄치게 되었다는 것.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만 있다면, 멸종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마치 가족의 사랑으로 멸종 위기에서 벗어난 나의 이야기 같았다. 관람객들이 분주히 오고 가는 가운데,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시간이었다.


박물관을 둘러보며 큰 아이는 어느새 영어 설명문을 읽어가며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체험 코너에서 화석 발굴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몇 년 전 목포에서의 그날을 떠올렸다.


"그때 목포에서 자연사박물관 갔을 때 생각나네." 아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때 당신 표정이 참 복잡해 보였는데, 지금은 정말 편안해 보여."


"그때는 아직 변화하는 중이었으니까. 지금은 좀 더 확신이 서는 것 같아."


박물관을 나서는 길, 큰 아들이 내게 다가왔다.


"아빠, 자연사박물관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인 것 같아. 우리 집 앞에서 시작해서 목포에서도, 여기서도."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우리 가족이 함께 걸어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사우스 켄싱턴의 여유로운 거리를 걸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물들이 늘어선 거리에서 아이들은 미래를 꿈꾸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그런 가족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저녁이 되어 하이드 파크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템스강변으로 나왔다. 해질 무렵의 런던은 고요하면서도 웅장했다. 강물 위로 비치는 석양이 물결을 타고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지난 몇 년간의 변화를 되짚어보았다.


"아빠, 강물에 비친 건물들 봐. 물이 흐르니까 건물들이 춤을 추는 것 같아."


작은 아이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그 작은 손의 온기를 느끼며 답했다.


"그래, 물은 계속 흘러가면서 변하잖아. 여기 강물만큼 오랫동안 세계 역사를 지켜본 존재도 없을 거야."


아내는 강물에 비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난날의 모든 순간들이 떠오른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정말 기적 같아."


그날 밤, 호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런던의 밤은 고요했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더 생동감 있게 뛰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더 이상 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 오면 무언가로 그 적막을 채워야 했는데, 이제는 고요함 속에서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옆에서 잠든 가족들의 고른 숨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장가처럼 들렸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대영박물관을 찾았다. 인류 문명의 흔적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아이들은 또 다른 경이로움에 빠져들었다. 이집트 미라관에서, 그리스 조각상 앞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냈고, 나는 그 호기심 가득한 눈빛들을 보며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돈이나 지위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였다.


마지막 날 저녁, 런던아이에 올랐다. 천천히 돌아가는 관람차 안에서 바라본 런던의 야경은 환상적이었다. 템스강을 따라 늘어선 불빛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숨 쉬고 있었다.


"아빠, 우리 언제 또 이런 여행할 수 있을까?" 작은 아이가 아쉬워하며 물었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아쉽지? 아빠도 아쉬워. 그런데 이런 기분을 잊지 않으면 일상도 특별해질 수 있어."


관람차가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했을 때, 나는 문득 목포에서 바라본 수평선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겨우 수평선 너머를 상상할 수 있었을 뿐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실제로 그 너머의 세상에 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가족과 함께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아내가 말했다.


"이번 여행이 끝나는 게 아쉽긴 하지만, 돌아가서도 이 기분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아내의 말에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래, 이제는 여행이 끝나도 일상이 다시 여행이 될 수 있을 거야."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여행의 피로에 아이들은 스르르 잠들어 있었지만, 아이들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고요한 풍경을 보며, 나는 더 이상 멸종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나의 삶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지난날 나를 짓눌렀던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새로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