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쥐포와 오징어

오징어의 꿈

by 구현

1991년, 부산 남포동 극장가는 젊음과 낭만, 그리고 짙은 욕망이 뒤섞인 격렬한 에너지로 가득했다. 스물세 살, 갓 제대한 그는 혈기왕성한 청춘의 열기를 온몸에 품고 있었다. 콜라 상자를 나르는 그의 발걸음은 국제시장의 분주한 소음과 자갈치시장의 청량한 비린내가 뒤섞인 이 도시 특유의 활력을 자연스레 익혀가고 있었다.


극장 벽면마다 걸린 거대한 영화 간판들은 붓으로 그려낸 선명한 색채와 극적인 장면들로 가득했다.


컬러 TV와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영화관의 위상이 흔들리던 때에도 이 거리만큼은 열기를 잃지 않았다. 당시 한국 영화는 침체기를 겪었고, 관객들은 <영웅본색> 같은 홍콩 누아르와 성룡 주연의 액션 영화에 열광했다. 거리에는 주윤발, 장국영처럼 멋을 낸 청년들과 설렘 가득한 아가씨들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주윤발이 왔다 아이가! 오징어가 불나게 생겼데이!"


김 여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극장가 전체를 울렸다. 그는 콜라 상자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며 리어카에 수북하게 쌓인 오징어를 바라봤다. 연탄불 위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오징어 냄새가 그의 코를 간질였다. 영화가 시작되자 극장 앞은 썰물처럼 한적해졌다. 김 여사는 떨어진 오징어 다리 하나를 연탄불에 구워 그에게 건넸다.


"어이쿠, 다리가 하나 떨어졌네예."


"다리 세면서 먹나? 하기야, 다리 하나 없다고 찾아와서 따지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


"오징어는 다리가 짭조름한 게 맛이 있어예."


"양산 촌놈이 오징어 먹을 줄은 아네."


"여사님 덕분이지예. 그런데 요새는 쥐포는 안 파십니까? 우리 시골에서는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못 먹어봤어예."


그의 말에 김 여사는 오징어 집게를 든 채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쥐포! 아이고마, 말도 마라. 한때는 쥐포가 최고였지.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연탄불 하나 놓고 저 극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쥐포를 팔았다 아이가. 허구한 날 쫓겨나고, 쥐포 다 뺏기고 말도 아니었다. 목숨 걸고 지킨 자리다, 이 자리가. 그 쥐치가 안 잡히니까 오징어로 갈아탔지. 그때부터 자리를 잡았지. 오징어는 내한테는 은인이다."


그 씁쓸한 이야기 속에서 그는 깨달았다. 김 여사에게 오징어는 단순한 생계수단이 아니었다. 쥐포가 지독했던 과거라면, 연탄불 위에서 지글거리는 오징어는 모진 세월을 견디게 해준 은인이자 행운의 상징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오징어 리어카에서 불과 몇 걸음 뒤의 어두운 오락실의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속에서 몇 명의 건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동네 양아치들과는 달랐다. 사행성 오락실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형님'들의 똘마니들이었다. 공기마저 굳어지는 듯, 그들의 등장은 주변의 활기를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김 여사는 오징어 집게를 내려놓으며 그에게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니는 이제 그만 가거래이. 내일 보자."


그는 직감적으로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저들은 단순히 돈만 뜯어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 거리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 아래, 노점들의 뒤를 든든히 봐주는 대신 정기적인 '관리비'를 챙기는 공생 관계였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콜라 트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귀는 여전히 그들의 대화를 향해 있었다.


"김 여사, 주윤발이 오니까, 극장에 사람이 꽉 찼다 카대예!"


"내는 정신없이 바빴다 아이가. 오징어 갖다 놓기가 바쁠 지경이라."


김 여사는 다가오는 건달들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었다. 극장 앞에 오징어를 파는 노점의 수가 정해진 것도 그들의 입김이 절대적이었다. 안 그랬다면 이 바닥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치열한 경쟁으로 피바람이 났을지도 모른다. 김 여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허리춤에서 만 원짜리 한 뭉치를 꺼내 재빠르게 그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는 트럭에 시동을 걸며 백미러로 김 여사와 남자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돈을 주고받는 찰나의 순간, 그들의 표정에는 미묘한 긴장과 함께 익숙함이 묻어났다. 그는 김 여사가 단순한 노점상이 아니라, 이 거리의 생리를 꿰뚫고 있는 진짜 '터줏대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건달들은 겉으로는 거들먹거리지만, 결국 이 바닥의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공생 관계였다. 그 미묘한 균형 속에서 김 여사는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멀리서 돌아본 김 여사의 뒷모습에서는 묵묵한 생존자의 쓸쓸함이 느껴졌다. 화려한 영화와 낭만이 넘실거리는 이 거리 뒤편에는, 김 여사처럼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맞서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존재했다.


쥐포에서 오징어로. 쫓겨남에서 터줏대감으로. 그 긴 여정의 무게가 연탄불 위에서 지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