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의 꿈
파리채를 휘두르는 소리조차 체념에 젖어 있었다. 오징어 리어카 위를 맴도는 파리들은 김 여사의 무기력한 손길을 비웃기라도 하듯 느릿느릿 주변을 맴돌았다. 추석 명절을 앞둔 극장가는 들떠 있었지만, 그녀만은 달랐다.
이혼 후 소식이 끊긴 아들. 시골에 홀로 계신 노모. 명절이 다가올수록 그 두 사람은 가슴 한쪽을 더 세게 조여왔다.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를 때면 리어카 밑에 숨겨둔 소주병을 꺼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소주가 쓰라린 현실을 녹여주기를 바랐지만, 눈을 뜨면 이 자리, 이 냄새, 이 외로움뿐이었다.
하루라도 비우면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는 자리. 목숨보다 소중하지만, 파리 목숨만큼이나 위태로운 자리. 김 여사는 이십 년이 넘도록 단 하루도 이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영화관이 쉬는 날이 없듯이.
"김 여사, 그라지 말고 한 번 명절에 갔다 오이소. 인자 돈 좀 번다 생각하면 마음도 편하고."
극장 홍보 기사가 혀를 차며 다가왔지만, 김 여사는 쓴웃음만 지었다.
"니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지랄이냐. 이 자리를 비우고 어예 발길이 떨어지겠노."
바로 그때였다.
"시골에서 전화 왔어예. 얼릉 받아보이소."
오락실 여직원의 다급한 목소리에 김 여사가 뛰어갔다. 파칭코 기계들이 요란하게 쏟아내는 쇠구슬 소리 사이로, 떨리는 손이 수화기를 향했다.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전화가 올 리 없었다.
"여보세요?"
"이혼한 네 남편한테 간 아가, 이번 추석에 시골집에 온다 카더라. 군대도 갔다 왔다더라."
시골 노모의 울먹이는 벅찬 목소리였다. 김 여사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들이, 진짜 온다 카셨나예?"
"그라네, 우리 집 주소도 물어보데이. 할매 보고 싶다 카더라."
전화를 끊고도 김 여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락실의 소음이 저 멀리 밀려가고, 세상이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기쁨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왔다. 아들은 과연 자신을 이해해 줄까. 엄마라고 불러줄까.
며칠을 뒤척인 끝에 김 여사는 결단을 내렸다. 이 자리를 맡길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콜라를 배달하는 청년. 그를 아들처럼 챙겨 왔고, 그 역시 김 여사에게서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며 믿고 의지했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생명줄 같은 오징어리어카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대목인 명절 장사를 남에게 맡기는 것은 고양이가 자신의 영역을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락실 건달들의 의심 어린 시선, 다른 상인들의 시기,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 모든 게 위험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주변에서 다 아는 콜라 청년이기에 오해를 살 일도 없을 터였다.
그에게도 김 여사의 제안은 단순한 알바가 아니었다. 묵직한 콜라 상자만 나르던 일상에서 벗어나 장사의 실전을 배울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골 농사보다는 도시 장사가 낫다는 생각으로 부산에 온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김 여사는 그에게 오징어 굽는 방법을 가르쳤다.
"오징어 장사는 연탄불이 생명인기라. 불이 너무 세면 오징어가 겉만 타 뿌리고, 그렇다고 약하면 굽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아이가."
"시간 날 때마다 오징어에 가위질을 해줘야 영화 보면서 먹기가 좋제."
그는 의외의 재능을 보였다. 손님들에게 서글서글했고, 농담도 적당히 할 줄 알았다. 오징어도 김 여사가 놀랄 만큼 노릇하게 구워냈다.
김 여사는 조금씩 안심이 됐다. 근처 백화점을 드나들며 노모에게 드릴 한복과 건강식품을 고르는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추석 연휴 사흘만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물건 값은 물건 들어 올 때마다 바로 줘야 된다. 그라고 자릿세 명분으로 하루에 이십만 원만 나한테 주면 된다."
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20만 원? 월급이 50만 원 남짓한 그에게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단순히 일당 정도로 받을 줄 알았던 그에게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김 여사는 장사에 관심이 많은 아들 같은 그에게 후한 인심을 베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만약 장사가 안 되면? 적자가 나면?
"근데... 안 팔리면..."
김 여사의 눈빛이 변했다. 순간 그녀는 스무 해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진짜 터줏대감의 얼굴을 보였다.
"그게 무신 소리고! 그걸 걱정하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곧 어머니 같은 미소를 지었다.
"팔아봐라, 그라면 내 돌아오면 큰절을 열 번도 넘게 할기다."
김 여사가 극장 간판을 가리켰다. 석양에 물든 성룡의 얼굴이 거대하게 떠 있었다.
"저 큰 간판에 걸린 영화배우가 누군지 봐라. 성룡이다 성룡! 이번 추석에 성룡 신작이 개봉한다 아이가!"
그녀의 목소리에 확신이 배어 있었다.
"명절 대목엔 역시 성룡 영화라! 젊은 놈들이 데이트하러 오고, 가족들이 같이 보러 오고... 오징어가 불나게 팔릴 기다!"
하지만 그 확신 속에도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게임이었다. 김 여사에게도, 그에게도. 서로의 믿음을 담보로 한 위험한 게임.
김 여사가 고향 가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부산 거리가 멀어져 갔다. 그 시간, 그는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로 오징어를 진열했다.
이것은 단순한 아르바이트가 아니었다. 김 여사의 스무 해 인생이 걸린 자리를 삼일 동안 맡은 것이었다. 그녀의 신뢰를 저버린다면 그 책임은 적지 않을 것이다.
연탄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오징어를 굽는 냄새가 거리로 번져나가자 조조 상영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는 김 여사가 가르쳐준 대로 오징어를 뒤집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이 작은 리어카 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김 여사에게는 아들과의 재회를, 자신에게는 꿈을 향한 첫걸음을 가져다주기를.
성룡의 간판이 청명한 가을 햇살에 번쩍이고 있었다. 명절 대목이 시작됐다. 게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