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도시의 꿈

오징어의 꿈

by 구현

양산 원동면에서 나고 자란 그는 농사일에 지쳐 있던 청소년기를 보냈다. 끝없이 반복되는 농사일. 땀냄새와 흙냄새가 배어든 옷. 도시에 나가 취직한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보낸 그 답답한 시절. 그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새벽마다 밭으로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만은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군 운전병으로 제대한 후, 보란 듯이 도시에서 성공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부산으로 향했다. 읍내 버스정류장에서 부모님은 돼지 한 마리 판 돈을 그에게 쥐어주며 걱정과 기대를 담은 눈빛으로 아들을 배웅했다. 고향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그는 그 소중한 돈과 끓어오르는 희망을 가슴에 품었다. 도시에서 자리를 잡겠다는 패기로 시작한 일은 콜라 배달이었다.


군대에서 익힌 운전 실력으로 빨간 티셔츠를 입고 트럭 운전대를 잡았다. 남포동 극장가와 국제시장을 오가며 그는 부산의 심장부를 누볐다. 처음에는 낯선 대도시의 복잡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느껴졌지만, 차츰 그 길들이 그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콜라 트럭을 몰고 극장가로 들어서면 노점상들이 길을 점령해 도로가 더욱 좁아졌다. 매일 같은 길을 오가니 자연스럽게 상인들과 얼굴을 익히게 되었고, 사근사근한 성격의 그는 누구에게나 먼저 인사를 건네며 호감을 샀다. 배달도 영업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교육받은 그는 그 붉은 티셔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단순한 배달원을 넘어,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는 붉은 트럭의 청년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마주한 남포동 극장가는 자신이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시골 개울만 보던 그에게 부산은 광활한 바다를 품은 황홀한 도시였다. 자갈치와 국제시장 사이에 자리한 부산극장, 제일극장, 국도극장으로 이어지는 극장 건물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며, 저마다 거대한 영화 포스터를 내세우며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된 남포동은 거대한 상권을 이루었고, 극장이 그 활기의 중심에 있었다.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화는 현실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래서 이곳은 전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의 영화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1991년, 세상이 어수선해도 남포동 극장가는 늘 북적였다. 답답한 현실일수록 사람들은 영화에서 위로를 받으며 감성에 젖어들었다. 극장 매점의 콜라는 주말이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고, 노점들도 건물 하나 살 정도로 장사가 잘 된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런 활기찬 극장가에서 그가 가장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오징어 리어카의 김 여사였다.


처음에는 퉁명스럽던 김 여사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녀가 왜 자신에게 유난히 따뜻하게 대하는지를. 그녀의 삶은 연탄 연기처럼 매캐했고, 늘 오징어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리어카가 그녀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 깊은 곳에는 그가 낯선 도시에서 마주했던 외로움과 똑같은 종류의 슬픔이 서려 있었다.


어느 비 내리는 오후였다. 하늘이 잿빛으로 흐려지고,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손님이 뜸한 시간, 김 여사가 연탄 화덕에 김치찌개를 끓이며 소주를 한 잔 하고 있었다. 마침 콜라 배달을 온 그를 불러 옆에 앉히고는 고봉으로 밥 한 그릇을 내밀었다.


"객지 생활이 힘들제, 와 이리 말라가노."


숟가락을 건네는 그녀의 손이 유난히 투박했다. 오징어를 다듬고 구우며 거칠어진 손. 그 손에는 거친 세월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취기가 조금 오른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의 구타와 술주정을 견디다 못해 어린 아들을 빼앗기듯 남자 집안에 남겨두어야 했다. 그렇게 홀로 남포동 길바닥에서 장사를 시작해야 했던 아픈 사연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그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한이 담겨 있었다.


"우리 아들도 니만 할 낀데. 니는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아야 된다."


그녀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중얼거렸던 그 한마디가, 지금도 그의 귀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날, 그는 김 여사의 김치찌개 한 그릇에서 삶의 쓰라림과 따스함을 동시에 맛봤다. 국물 속에는 김치와 돼지고기의 깊은 맛을 넘어선, 한 여인의 모진 세월이 녹아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꿈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과, 목숨 걸고 자리를 지켜낸 그녀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그는 막연했던 성공에 대한 꿈을 비로소 구체적으로 다듬기 시작했다.


언젠가 나도 저런 삶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김 여사처럼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그때는 몰랐다. 그가 오징어를 구워 파는 김 여사 곁에서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훗날 그의 삶을 어떤 모습으로 빚어낼지를. 연탄불에서 지글거리던 오징어들이, 그의 꿈속에서 어떤 의미로 되살아날지를.


비는 그치지 않았고, 노점의 파라솔 아래서 두 사람은 모자지간처럼 다정하게 늦은 점심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