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박물관] 1화

by 구현

화장실은 깨끗하고 조명도 밝았다. 새하얀 벽타일에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까지, 신축 건물다운 정결함이 절정에 달한 장소는 역시 이곳이었다. 여기에 향긋한 라벤더 향까지 더해지니, 고통스러운 숙취 속에서도 이 정도면 견딜 만했다.


문마다 [사용가능] LED 글귀가 친절하게 발광하고 있었고, 다행히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본능처럼 제일 구석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워낙 매끈해 차가워 보이는 금속 재질의 문고리를 잽싸게 돌렸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용중]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보다 유용한 영역 표시가 있을까. 그럼에도 혹시 모를 방문자를 의식해 물 내림 버튼을 눌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재빨리, 얼굴을 변기에 정조준했다.


꾹꾹 참고 있던 위의 경련을 힘껏 부추겼다. 그 순간, 소용돌이치며 사라지는 거친 폭포의 맑은 물 냄새가 폐 속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어 왔다. 이건 완전히 역효과였다. 상쾌한 물 분자의 효과인지 위는 경련을 거부했다.


제기랄, 검지를 입속에 최대한 밀어 넣었다. 속을 비워내는 것이 상책이다. 위가 격하게 꿈틀거리자, 동네 단골 내과 의사의 정색한 음성이 사늘하게 뒤통수를 감쌌다.


"위의 압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부득이 토하실 경우에는 양손으로 복부를 이렇게 감싸서 최대한 보호를 해야 합니다. 과도하게 자극하다, 자칫 위가 파열되어 피를 토할 수도 있어요."


위는 자신을 쥐어짜며 진노란 위액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는 항변을 대신해 복부가 경직될 정도로 힘겹게 뒤틀었다.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송송히 맺히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을 터였다.


어젯밤, 아니 늦은 새벽이었나? 어렴풋이 뇌리 구석에 남은 것이라고는 맥주잔에서 소용돌이치는 거침없는 물방울 회오리와 니코틴에 찌든 냉랭한 에어컨 냄새가 전부였다. 어제저녁, 거래처 상무와 숯불에 고기를 구우며 소주 두 병을 비우기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다짐하지 않았나!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새로 생긴 자연사박물관에 같이 가기로 한, 아이들과의 약속을 잊지 말자고. 그 다짐은 뜨거운 술기운 속에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자, 시큼한 위액만큼이나 쓰디쓴 죄책감이 밀려왔다.


영업과장으로 진급 이후, 업무 시간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건 사실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술자리는 오래 묵은 흐름이자 거창하게 말하면 일종의 문화였다. 비철 원자재를 생산하는 기업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주 거래처인 제조업체 영업 관리직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국제 원자재 단가는 잔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불확실성에 몸살을 앓는 국내외 시장은 갈수록 치열한 전장의 모습을 더욱 리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영업이론을 능가하는 그 무언가를 요구하는 살벌한 현실. 쌓이는 미수금, 피보다 진한 척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둑한 밤하늘을 불태우는 네온사인은 은밀한 공간을 초과 생산해 냈다.


'우린 프로다,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는 각오를 되뇌었다. 알코올 따위에 흐트러지면 안 된다. 분위기를 사로잡아야 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답지 않은 소리나 지껄이는 연예인만큼의 수당은 받지 못하더라도 그 정도의 분위기는 만들어야 한다. 상대가 누구든 나의 형제가 되고, 거래처 사람은 '나는 행복한 사람'을 열창하며 짙은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앳된 아가씨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곳이 바로 전투의 현장이다.


상쾌한 아침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지각색의 해장국이 일출의 장관보다 진하게 떠오르는, 숙취로 얼룩진 하루의 시작이 반복될 뿐이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새로 생긴 자연사 박물관에 같이 가자고 조르던 아이들의 성화에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던 어제의 나와, 지금 이 화장실에 웅크리고 있는 비루한 현실의 나는 너무도 달랐다. 아이들의 기대 가득한 눈망울이 떠오르자, 다시금 역류하는 위액만큼이나 자괴감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