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박물관] 2화

by 구현

아이들의 신뢰가 바닥인 남편 체면을 모처럼 살릴 기회라고 아내는 생각했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새로 생긴 자연사 박물관이니 말이다. 그러나 알코올은 알고 있었다. 엎드리면 코 닿을 곳을 얕잡아 보다 큰 코 다칠 거란 걸.


언제나 그렇게 당하면서도, 간은 일정량의 알코올을 해독할 뿐이라는 사실을 왜 알지 못할까. 뇌가 먼저 취해 버렸으니…….


<우리 생명진화관에 있어. 2층!>


우라질, 왜 이렇게 멍청한가! 자판기가 내뱉은 시원한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다가 아내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또다시, 달짝지근한 것이 예민한 곳을 자극하며 솟구쳐 올랐다. 맑은 물 분자로 가득한 해우소로 뒤돌아섰다. 중앙홀의 거대한 티라노사우루스 뼈대의 텅 빈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본다. 하기야 이게 몇 번째인가.


작은 아이가 생명진화관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달려들었다. 꽤 흥미로운 걸 발견한 눈치다.


“아빠. 이것 봐요. 다 발가벗고 있어요. 키키키.”


수줍음 많이 타는 막내의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예쁘다. 애써 말짱한 얼굴로 전시장을 둘러봤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


구부정한 원숭이의 모습에서 점차 현 인류에 가깝게 진화하는 과정을 모형물로 만든 전시장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의 눈 속에 그려진 발가벗은 모습은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에서 흥미로웠을 것이다.

이런, 성기까지. 옷이라도 입히지. 호모라니? 왜 하필, 뭐 다른 뜻이 있었나?

이게 십만 년 전의 모습이라니, 감이 잡히지 않는 시간 개념이다. 불과 몇 시간 전 일조차 제대로 기억 못 하는 나라는 인간에게는…….


큰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답게 전시장을 유심히 살피다 아버지의 눈길이 머문 곳에 관심을 가진다.


“아빠, 사피엔스가 생각한다는 뜻이래요.”


오랜만에 동행한 아버지가 자신의 이야기에 더 주의 깊게 관심을 가지자, 흥이 오른 큰 아들은 친근하게 다가와 묻는다.


“아빠, 호모는 무슨 뜻이에요?”


다시, 입이 바짝 타들어간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아이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며 온갖 궁리를 해보았지만, 음흉한 눈빛의 남자 둘이 엉키는 모습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내가 거들었기에 망정이지 ‘그건 몰라도 돼!’라며 은근슬쩍 넘길 뻔했다.

아내가 말했다.


"호모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아주 옛날부터 살았던 모든 사람을 다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럼 우리도 호모예요?”


“그렇지, 우리도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라고 할 수 있지.”


머릿속의 벌거벗은 두 남자로 인해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참을 만하다. 이제 더 이상 빼낼 것도 없다. 또다시 술을 마실 수 있을까. 며칠 전에도 심각하게 읊조린 넋두리 아닌가. 과연 나도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맞는지, 멍하게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를 다시 쳐다봤다. 전시 조명에 번들거리는 연한 주황색 살결이 눈에 거슬린다.

몸은 참 좋군. 사냥하고 채집하느라 배가 나올 겨를이 없었을 거야.

술에 절어 불룩한 뱃살이 제 주인을 올려다봤다. 이것도 진화인지, 그럴 수도 있겠네.


큰 아이는 제 엄마 곁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전시물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형에게 밀려 엄마를 빼앗긴 작은 아이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내 팔에 매달렸다. 생명진화관을 빠져나와 2층 중앙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은 아이는 환하게 소리쳤다.


“야, 코끼리다!”


거대한 매머드 모형이었다.


“바보야, 그건 매머드야.”


큰 아이의 단호한 목소리가 차가운 돌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난 바보 아니야. 저건 코끼리야. 맞지, 아빠!”


약이 단단히 오른 막내를 달래 겸 대충 타협점을 찾아보았다. 코가 저렇게 긴 동물은 쟤들 밖에 없잖아. 이름이 좀 다를 뿐이지.


“으응, 코끼리나 매머드나 다 같지 뭐.”


“거 봐, 형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큰 아이는 진리를 오도당해 자존심이 상한 선지자의 의연한 표정으로 무지한 상대를 노려봤다.


“아빠! 매머드랑 코끼리는 분명히 다른 종류예요.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분위기 파악이 전혀 되지 않는 막내는 축 늘어진 내 팔에 매달리며 응석을 부린다.


“아빠, 우리 동물원에 코끼리 보러 가요.”


큰 아이의 얼굴이 창백하리만큼 싸늘해지며 야무지게 동생을 공격했다.


“이 바보야, 아빠가 동물원에 갈 시간이 어디 있어!”


“난 바보 아니야. 아빠, 형아가 자꾸 바보라고 놀려요.”


모처럼 아빠의 팔에 매달린 막내는 제대로 방어막을 만들었다.


“동민아, 동생한테 그러면 못써. 사과해!”


“모르면 바보죠!”


“이 녀석이 어디서 말대꾸야!”


강약 조절에 실패한 고함 소리에 놀란 막내는 내 팔에서 떨어져 나가 아내에게 떼를 썼다.


“엄마! 동물원에 놀러 가요, 예에.”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잠시 멈칫한 아내가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아이를 추스르며 달랬다.


“응! 그래. 동물원은 차 타고 멀리 가야 하니깐, 아빠랑 같이…….”


큰 아이는 방향을 틀어 다른 전시장을 향하며 매서운 한방을 날렸다.


“쳇! 그냥 우리끼리 가요.”


어느새 아이가 이렇게 컸단 말인가. 하기야 얼마나 많은 약속을 술잔에 빠뜨렸나. 몸 밖으로 빠져나갔던 알코올 찌꺼기가 허공을 맴돌다 제 주인을 찾아 복귀한 것처럼 혈압이 급상승했다. 괜한 화살은 아내에게로 날아갔다.


“당신, 애들 어떻게 가르치는 거야.”


언성이 너무 높았나,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이 날카롭게 우리 쪽을 겨냥했다. 일요일이라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은 탓에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시선이 몰렸다.


“여보, 그만해! 다들 동네 사람들이야.”


아내의 조심스러운 눈치에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그래! 창피하다 이거군. 그럼 사라져 줄게.”





이전 01화[자연사박물관] 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