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부산의 메아리 (마지막 이야기)

오징어의 꿈

by 구현

그는 가족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떠났다. 고향 양산에 들렀다가, 부산 남포동으로 곧장 차를 몰았다. 남포동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해운대 바다로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빠, 이렇게 더운데 남포동에 왜 온 거예요? 시원한 해운대로 가는 줄 알았는데!"


아들의 투덜거림에 그는 멋쩍게 웃었다. 휴가 오기 전 날부터 남편의 애틋한 눈빛을 본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숙소도 오늘은 여기에 정했어. 해운대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야. 엄마도 부산은 처음이라 꼭 여기에 와보고 싶었어."


그는 가족들을 이끌고 자신이 30년 전 도망쳤던 극장가 거리로 향했다. 90년대의 남포동 극장가는 영화 간판이 거리 전체를 압도하고, 오징어 연탄불의 매캐한 연기와 노점상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활력이 넘치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거대한 영화 간판들은 온데간데없고, 극장 건물들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현대적으로 리모델링되어 영화관임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거리를 가득 채웠던 영화 포스터 대신, 화려하지만 텅 빈 듯한 통유리 건물에 젊은 감각의 옷가게, 카페, 그리고 각종 프랜차이즈 식당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길거리 노점들도 훨씬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낯선 거리에 서 있었다.


가족들과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풍경 위로 덧씌워져 보였다.


‘김 여사님은… 내가 내팽개치고 간 그 자리를 보며 얼마나 허탈했을까. 건달들의 협박과 주변 노점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감당했을 텐데.’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30년을 짓누르던 죄책감이었다. 오징어를 구워 파는 노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고소하고 달콤한 씨앗호떡 냄새만이 바람에 실려왔다.


문득, 저 멀리 호떡을 굽고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부정한 어깨와 손놀림이 어쩐지 김 여사를 닮아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아빠, 저기 씨앗호떡 맛있대요! 우리도 하나 먹어봐요!"


딸의 목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 할머니는 김 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면서도 가슴 한 편이 아려왔다.


가족들과 함께 씨앗호떡을 사 들고 골목을 걷는 그의 마음은 복잡미묘했다. 과거의 치열함과 현재의 평화로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아내는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즐거워했고, 그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30년 동안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해가 저물고, 가족들은 자갈치 시장의 한 횟집으로 향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싱싱한 활어회 한 점을 맛보며, 그는 어둑해지는 영도다리의 고요한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창밖의 바다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어쩌면 김 여사는 그에게 빚이 아니라, 평생을 바쳐 갚아야 할 삶의 지표를 남겨준 것일지도 몰랐다. 삶의 비릿함 속에서도 사람의 온정을 느끼게 해 주었던 김 여사의 기억이, 시원한 바닷바람처럼 그를 감싸 안으며 다시 한번 다독이는 듯했다.



다음 날, 가족들과 함께 해운대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부산을 찬찬히 둘러봤다. 부산은 더 이상 도망쳤던 거리가 아니었다. 과거의 아픔을 보듬고, 현재의 행복을 감사하게 하는 곳이었다.


창밖으로 세계 최장의 캔틸레버 지붕이 웅장하게 드리워진 영화의 전당이 펼쳐졌다.


"아빠, 부산국제영화제 할 때 와 보고 싶어요."


아들의 말에 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룡이 왔다아이가. 오징어가 불나게 생겼다아이가."


부산의 메아리가 그의 귀에 선명하게 울렸다.


잠시 뒤, 시야 가득 푸른 바다가 밀려들었다. 그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