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세레나데 터널

당정뜰 메타세쿼이아길, 산책이야기

by 구현

내가 사는 남양주 다산은 하남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이다. 가까운 곳을 우선으로 가다 보니 명품 산책로를 두루 가진 하남을 찾게 된다. 집에서 차로 20분이면 도착하는 이곳. 숲 속에 숨겨놓은 미술관으로 들어서는 입구처럼 정갈한 메타세쿼이아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무더위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지만, 한 발 한 발 그늘진 길을 걷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다.


바로 옆 미사대로를 지나는 수많은 차량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 길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소음을 압도하는 거대한 소리가 터널처럼 울려 퍼진다.


이 소리의 주인공인 매미는 땅속에서 길게는 십여 년을 기다린 끝에 단 한 번, 뜨거운 여름을 위해 세상으로 나온다.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내는 이 압도적인 울음은 그들의 짧은 생애만큼이나 간절하다. 매미의 울음은 그저 시끄러운 소음이 아니다. 바로 번식을 향한 그들만의 세레나데다. 수많은 매미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이 거대한 합창 속에서 나는 이 아름다운 산책로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무와 매미 소리가 만든 천상의 터널을 걸었다. 뜨거운 공기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전해주는 생명의 기운에 푹 파묻혔다. 하늘 높이 뻗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은 서로 팔을 맞잡은 듯 짙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그 아래로 이어진 오솔길은 동화 속 길처럼 정겹고 화사하다.


앙증맞은 잎을 가진 이 거대한 나무들은 대체 얼마나 자란 것일까? 이 나무들은 1999년부터 하남시 도시 공사 현장에서 버려질 뻔한 나무들을 옮겨 심어 키운 것이라고 한다. 2007년에 본격적인 산책길로 조성되었으니, 지금의 웅장한 모습은 약 26년간의 세월이 만든 결과물이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보이는 나무들의 줄기는 거칠면서도 굳건해 보이고, 그 위에서 한껏 소리를 내는 매미의 모습은 이 길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 모든 풍경이 어우러져 만드는 평화로움은 무더위마저 잊게 할 만큼 벅차다.


지난번 걸었던 미사뚝방길이 홍수를 막기 위한 생존의 제방이었다면, 이곳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버려질 뻔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으로 탄생한 길이다. 두 길은 서로 다른 이유로 조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의 필요와 의지로 만들어진 인공의 자연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생존의 길이었던 뚝방길과 생명을 살린 메타세쿼이아길. 서로 다른 출발점에도 불구하고 두 길 모두 이제는 시민들에게 위로와 휴식을 선사하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이 길에서는 걸음도 저절로 경쾌해진다. 무성한 나무들과 매미 소리가 만든 이 푸른 터널은 도시의 소음과 더위를 막아주는 든든한 방패이자, 삶에 지친 우리에게 휴식을 선물하는 가장 완벽한 산책로가 되었다.


무더운 여름날,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온전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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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한여름, 쉬는 날이 이어지면서 거의 매일 산책로를 찾아다녔다. 내가 하는 도로 공사 일이란 게 하늘의 허락은 물론이고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일이 된다. 그게 일용직이란 조건을 만든 숙명이기도 하다.


일이 넘쳐나는 세월이 작년부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마침 작년 다산으로 이사를 하고 왕숙천에서 산책의 묘미를 깨닫게 되었다. 불행과 행운은 이처럼 같이 다니는 모양이다. 좀 더 다채로운 산책 이야기를 만들고 싶지만 먼 곳까지 다니기엔 부담스럽다. 가까운 산책로에서도 충분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주변을 찾아다녔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는 곳마다 생동감이 넘치고 새롭다.


아스팔트 포장 일을 주로 하는 나로서는 이 여름, 일이 없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될 정도로 무더웠다. 산책로를 찾아다니는 것은 나에겐 그저 행복이지만, 다음 달이 걱정되어 억지로 일을 좀 하기는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힘든 여름이 이제 저물고 있다. 겨울이 되기 전에 일이 있기를 바라본다. 나와 같이 일하는 작업반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특히, 젊은 작업반들을 위해 나는 간절히 기도를 할 정도다. 나이가 들어가니, 그저 기도를 하게 된다. 진심으로. 이제야 어른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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