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점등식. 1화

2만 2천 볼트 아래서

by 구현

내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갈기갈기 찢겨 있다. 전압을 머금은 채 살아있는 수많은 전선들이, 절연바스켓을 타고 올라가는 나를 무심히 내려다본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 한복판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먹잇감을 관찰하듯이. 한겨울의 청명한 바람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의 긴장한 눈동자를 현란하게 흔들어댄다.


밋밋하게 이어진 낙뢰방지선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머문다. 그 아래 2만 2천900 볼트 고압선들이 머리에 닿을 듯 다가온다.


울렁거리는 절연바스켓을 다독거려 그 아래 어지럽게 늘어진 저압선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작업공간을 확보한다. 불법으로 설치된 온갖 케이블까지 겹쳐 시야는 더욱 어수선하지만, 이내 문제의 지점을 찾아낸다.


고압선과 변압기 연결 부위, 낡은 부품이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 절연바스켓을 미세하게 조정해 근접한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킨다. 양쪽 어깨부터 팔을 감싸는 두꺼운 절연복으로 무장했지만, 그 속의 내 심장만은 거센 불꽃 주변을 맴도는 날벌레처럼 위태롭게 고동친다.


출근길에 확인한 문자 메시지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인천지부 조합원의 사망소식이었다. 고압선 애자 교체 작업 중 감전사고를 당한 그는 양팔과 다리를 절단하는 몇 번의 대수술 후 의식이 돌아왔지만, 정신적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로 결국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바람이 차다.


20년 전, 제대하고 이 일을 시작할 땐 그렇게 오르고 싶었던 그곳이었다.


노련한 전공(電工)이 되고 싶었다. 그것만이 그때의 유일한 꿈이었다. 전봇대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자재 이름을 외우고, 전공들의 손놀림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그들을 숭배했다. 이를 악물고 일을 배웠다.


경력이 쌓이고 나의 꿈은 이루어졌지만, 끔찍한 사고는 끊이지 않고 내 주변을 맴돌았다. 베테랑이라는 훈장은 언제든 부고장으로 바뀔 수 있는 위태로운 이름표였다.


냉철하게 뻗어있는 고압선을 휘감아 도는 한겨울의 찬바람은 두꺼운 절연장갑의 미세한 틈새를 파고들어 굳은살로 무장한 손마디마저 시리게 한다. 하지만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젖어간다.


낡은 부품을 교체하고 변압기 상태를 점검한 뒤 작업을 마무리했다. 안전화가 땅에 닿고, 여기저기서 피워 문 담배연기가 달게 펴져나간다. 회사로 복귀하는 작업차량의 행렬이 지는 석양에 지쳐 보이지만, 덜컹거리는 지면은 너무도 평온하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퇴근길 발걸음이 몇 번을 망설이다, 집 근처 마트로 향했다. 아내의 잔소리가 뻔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난 주말, 9살 막내가 마트에 진열된 크리스마스트리를 어찌나 유심히 바라보던지.


"아빠! 우리도 크리스마스트리 장식해요. 정말 멋있잖아요."


내 팔에 매달린 아이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온갖 색상의 작은 불빛들이 가득 차 있었다.


마트 계산대를 막 빠져나올 때였다.

경쾌한 캐럴이 트리를 안은 내 오른팔을 뜨겁게 달구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작은 트리 옆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아이들은 거실에서 잠들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쉴 새 없이 깜빡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