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부장님, 면목이 없습니다.”
“사장님에게는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대충 둘러댔어. 술 좀 줄여, 요령껏 해야지. 제수씨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더구먼.”
"경위서를 쓰겠습니다.”
“됐어. 신상에 별일 없다니 다행이야. 업무에 신경 써.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잖아.”
“물론입니다.”
화가 나면서도 근심 어린 표정을 완벽하게 연출하던 부장은 나의 당연한 답변을 기다리더니, 이내 냉철한 업무 모드로 돌변했다.
“수금이 문제야. 오늘 사장님이 수차례 강조하셨어. 현금 결제 비율을 높이고 어떻게든 미수를 줄여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명동실업 요즘 소문이 영 좋지 않아.”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특허분쟁 소문이 와전된 것입니다. 공인 변리사를 통해 자세히 조사했습니다. 잘 해결될 겁니다.”
“그래야지. 시장이 불안할수록 거래처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어야 해. 참, 오늘 제일기업 부사장과 미팅이 있다면서.”
“네. 저녁 식사를 제의해 왔습니다. 긴히 상의할 문제가 있답니다.”
“뻔하지! 단가 조정 건 아니겠어. 더 이상의 양보는 안 돼. 수입 저품질 상품들이 판친다고 덩달아 뛰다간 다 죽고 말아. 최 과장, 이럴 때일수록 거래처 관리를 잘해야지.”
회사 업무를 정리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30분 남짓 일찍 도착해 예약 룸으로 안내를 받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급한 미팅을 앞두고 무언가에 홀린 듯 ‘매머드 멸종’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관련 웹페이지를 찾아 빠르게 스크롤을 내렸다. 곧 매머드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약 480만 년 전부터 4천 년 전까지 존재했다는 거대한 생명체, 매머드. 키는 3.5에서 5미터가량, 현생 코끼리와는 달리 긴 털로 뒤덮여 있었다. 빙하기라는 혹독한 환경에도 살아남아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결국 멸종했다는 기록. 멸종 이유는 기후변화와 인류의 사냥이라는 가설이 분분하다는 내용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빙하기까지 버텨낸 거대한 포유류가 그렇게 쉽사리 사라질 수 있었을까? 구석기시대의 인간이 대체 얼마나 강했기에 그런 가설이 나왔을까? 어제의 꿈, 그 거대한 진동과 벼랑 끝의 기억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관련 검색을 이어가다 인류에 대한 정보가 나타났다. 원시 인류의 한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그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100만 년 전에 멸종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300만 년 이상 뇌가 발전하지 못한 채, 불과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인류의 조상들과 무려 100만 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지구상에 살다가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마치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다는 듯.
문득,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었다. 어떤 인간은 멸종의 길을 걷고 있고, 어떤 인간은 새로운 진화의 길목에서 고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명체의 조상 격인 삼엽충은 지구에서 3억 년을 살았고 공룡은 1억 5천만 년을 살았다. 그리고 깊은 땅속에 파묻혔다.
인류가 지구의 주인인 양 행세하지만 이처럼 광활한 생명의 역사에 비한다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개의 종에 불과할 뿐이다. 시간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창조의 신이며, 냉정한 심판관이었다.
고작 100년 뒤의 지구 위기를 논하는 것은 인류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지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태양을 돌고 돌 것이다. 인류의 문명 따위도 몇 억 년 뒤엔 다음 정복자의 발굴 대상이 될 것이다. 이 장대한 상념이 지금 이 자리의 나를 잡아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득 광활한 시간 앞에서 나의 번민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깨닫자, 문득 알 수 없는 해방감과 함께 새로운 가능성이 보였다.
두세 병의 술이 비워지자 예상보다 빠른 템포의 대화가 분위기를 살벌하게 휘몰아갔다.
“이봐, 최 과장. 어차피 경쟁이잖아? 우리 회사도, 최 과장 회사도, 굴지의 재벌도 시장에 나가면 다 똑같아. 미국도 중국산으로 국내 물가를 잡는 데 한몫하지 않았나. 그게 현실이야. 이번에 C사가 단가 인하를 제의해 왔네. 시장 경쟁력도 키워야 하고, 한 푼이라도 아쉬운 판이니. 그래, 내가 최 과장한테 이런 얘기하는 게 편하진 않아. 오죽하면 이러겠어……."
“부사장님, 매머드를 아십니까?”
상대의 뜬금없는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표정을 감추었다.
“매머드라, 멸종한 코끼리 조상 아닌가!”
“멸종, 맞습니다. 매머드는 기나긴 빙하기에 잘 적응하여 털로 뒤덮은 거대한 몸집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죠.”
“뜬금없이 생물 강의라도 할 셈인가?”
“부사장님,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런 매머드가 왜 멸종했을까요?”
박자를 놓친 고수의 엉뚱한 리듬에 명창은 반전을 노려보았다.
“관심 없어. 내가 죽을 판인데, 그게 뭔 대수인가.”
“인간이 다 잡아먹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여러 추측이 있지만 인간의 사냥 기술이 발전하던 시기에 매머드가 멸종한 건 사실입니다. 지혜로운 인간은 매머드를 분석한 겁니다. 엄청난 덩치 덕분에 방향 전환이 힘들고 거대한 몸집에 비해 겁이 많다는 것을 간파한 인간은 어떻게 했을까요? 늪지나 낭떠러지로 그들을 몰고 가서는 몰살시킨 겁니다.”
몰살이라는 단어에서 고수와 명창은 섬뜩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최 과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단가 협상을 거부하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방법을 찾자는 겁니다. 매입 단가나 인건비를 줄이는 식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인간은 벼랑 끝으로 서로를, 결국은 자기 자신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고개만 돌리면 풍족한 들판이 물결치고 있는데도, 결국 서로를 밀고 당기다 종말을 맞이하는 꼴입니다.”
“이봐, 최 과장! 오늘 왜 이래.”
“기분 나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부사장님, 솔직히 말씀드리죠. 당장 C사만큼의 단가 인하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최상급 원자재를 통해 부사장님 회사의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고 최종 제품의 차별화된 품질 향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 C사의 저가 공세에 휘말리면, 이 시장에는 내일이 없습니다. 저희의 제안이야말로 부사장님 회사의 시장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지켜줄 유일한 길입니다. 당장 몇 푼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장을 선점하는 데 필요한 진짜 지혜를 함께 모색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부사장님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저의 진심이자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