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
새벽 1시. 택시는 자연사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하룻밤 신세를 진, 목이 긴 공룡이 친근하게 내려다본다. 키가 너무 커서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보니 재채기가 나왔고, 몽땅 토하고 말았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혹시 암이라도 걸린 건가!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죽으면 불에 태워 뿌리겠지. 별다른 재산도 없이 빚만 잔뜩 남긴 놈인데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몹쓸 병까지 걸렸으니. 그럼 나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는 거구나. 저 공룡보다 못한 대우가 아닌가.
"미안하다. 오늘도 네 발 밑에 실례를 했구나. 나를 너무 원망하지는 마라. 희한하게 여기가 참 좋아. 그렇지만 다음 주엔 동물원에 가야겠다. 매머드보다 코끼리를 우리 아이들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코끼리는 살아있으니까!"
그때, 강한 불빛이 몇 번 스치고 지나더니 내 눈에 고정되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멀쩡하게 생긴 양반이……."
자연사 박물관의 야간 경비였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때렸다. 바로 집 앞인데, 내 얼굴을 경비 아저씨가 본다면 온 식구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게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제도 어떤 양반이 잔뜩 토하고 갔는데, 여기는 애들 교육 장소입니다."
도망치듯 공룡 공원을 빠져나왔다. 하늘을 가린 아파트 단지가 앞을 떡하니 막고 서 있다. 그 속으로, 숨 가쁘게 뛰고 또 뛰었다.
"어제도 어떤 양반이 잔뜩 토하고 갔다고. 그게 바로 나였지. 그래, 나. 그게 나의 흔적이구나. 결국, 술과 병으로 사라져 가는 나라는 족속의 흔적."
아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맞았다.
"또 토했구나. 제발 술 좀 마시지 마. 이러다 큰 병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래!"
아내의 눈에 금세 물기가 차올랐다. 나는 아내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검열 나온 사람처럼 집을 둘러보았다. 아늑하다. 아이들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큰놈은 만세를 부르며 자고, 작은 놈은 옷장에 몸을 밀착시켜 자세가 불안정해 보였다. 몸부림을 치다 옷장에 막힌 모양이다. 방문을 밀고 들어가려고 하자 아내가 팔을 강하게 잡아당기며 말린다.
"자기 옷 좀 봐. 이래 가지고 애들 방에 들어가서 뭘 어쩌려고. 어서 씻어."
아내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절망이 더 짙었다.
"더러운 노숙자 주제에 못 올 데를 왔구먼."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온몸을 풀어헤치듯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흩어져 사라지면 좋으련만, 나의 존재 이유는 아직 분명히 남아 있다. 하루가 다르게 작아지는 아이들의 잠옷과 이불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을 받았다. 지방간이 좀 있을 뿐 건강하단다. 위내시경 결과도 좋았다. 아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걱정거리가 사라진 얼굴은 아니다. 아내는 간절한 표정으로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이렇게 계속 토하는 게… 정말 괞찮은 건가요?"
의사가 내 차트를 다시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술을 많이 드시는군요? 위가 거부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신호예요."
나도 알고 있었다. 내 위는 술을 거부하기 위해 힘겹게 밖으로 밀어내는 거라고. 하지만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게 문제였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또 다른 진화의 방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변함없이 나는 거래처를 향해 걸어가고 그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고 토해낼 것이다.
300만 년, 아니 1억 년 뒤쯤의 세상은 우리를 어떻게 명명할지 모르겠다. 멸종과 진화가 멈춘 듯 완성된 듯 인류는 지금을 살고 있지만, 영원한 시간 아래 지금은 찰나일 뿐이다.
퇴근길에 자연사 박물관 앞에 잠시 멈추었다. 박물관 시계가 저녁 7시를 막 지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박제될 박물관앞을 지나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토요일 아침, 알람 소리보다 먼저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눈을 떴다. 아침 식탁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계란 토스트와 우유가 놓여 있었다.
"아빠, 오늘 동물원 가는 거죠?"
작은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약간의 조심스러움이 비쳤다.
"그럼! 아빠가 약속했잖아."
나는 자신있 대답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안스러움이 일었다.
동물원은 주말답게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큰아이는 매우 진지하게 매머드와 코끼리의 차이점을 설명했지만, 나와 막내는 코끼리가 건초 더미를 헤집으며 먹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아빠, 코끼리는 왜 코가 길어졌어요?"
작은 아이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형보다 많이 먹으려고 코가 길어진 거지."
"진짜?"
아내가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하마 우리로 뛰어갔고 나와 아내는 천천히 뒤를 쫓았다.
"여보."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응?"
"하루아침에 힘들다는 건 알지만 술 좀 줄여야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띤 얼굴로 아내를 바라봤다.
진화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쉬운 것도 아니다. 술을 거부하는 나의 위를 위해서라도, 아니 가족을 위해서라도 작은 변화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실감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 순간들이 모여, 보이지 않는 진화가 이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