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물
"우리 둘이 준비하기엔 좀 벅찬 감이 있지만, 혹한기 훈련 준비로 부대 전체가 비상이라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지만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바로 노종호 이병이라는 사실만으로 점등식 준비가 끝난 기분이다."
김 상병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교인들만 모여 치른 예전의 크리스마스 행사와는 달라. 올해는 단장님을 비롯해 부대 주요 인사들과 가족들이 모두 참여하는 중대한 행사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정성껏 준비해야 돼. 이번 크리스마스 점등식을 우리 부대 역사상 최고의 이벤트로 길이 남도록 하고 싶어."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종호야, 넌 오늘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이등병이 아닌 나의 동료이자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란다. 나는 너의 조수가 되어 열심히 도울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목소리인가.
동료. 일꾼.
막힌 변기도, 골칫거리도, 고문관도 아닌, 동료. 나 스스로 놀랄 만한 자신감과 힘이 솟아올랐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 상병은 여태껏 보아온 내 주변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처럼 편안하고 다정하게 나를 대해주었다. 계급장도, 말더듬도,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 상병은 일과시간에 맞춰 중대본부로 복귀시켜 주었다. 묵직한 긴장감에 휩싸였던 중대본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인사계 상사는 주번하사를 불러 나의 단본부 파견 근무를 지시했다.
"노종호 이병, 12월 25일까지 단본부 교회 점등식 준비작업에 파견한다."
덧붙여, 5분 대기조 명단에서 12월 마지막 주까지 제외시키라고 명령했다. 5분 대기조 제외.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다음, 더 믿기지 않는 기적이 식당 입구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식기당번들은 우리 동기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암기사항 점검도, 윽박지르는 소리도 없었다. 그냥 식당으로 바로 입장시켰다.
식사시간을 제한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밥을 먹었다. 동기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눈빛에도 놀라움과 안도가 가득했다. 국 한 숟가락을 천천히 떠서 입에 넣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밥을 먹어본 게 얼마 만인가. 살점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붙어 있지 않은 앙상한 닭 뼈를 잔반통에 부었다.
배가 불렀다.
그날 밤, 침상에 누워 하루를 되짚었다. 단본부 호출, 김 베드로 상병, 크리스마스 점등식, 파견근무, 5분 대기조 제외.
꿈인가 싶었다. 아니,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현실이 된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탈영을 꿈꾸던 내가, 오늘은 내일이 기다려진다.
감사했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몰랐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감사가 흘러나왔다.
달콤한 꿈을 꾸었다. 김 상병의 자상한 얼굴, 그의 여유로운 미소와 다정다감한 말투. 화려한 점등식의 그날, 나는 김 상병과 나란히 서서 주인공이 되었다. 밤하늘에 불빛이 쏟아지고, 군악대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꿈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기분이 달랐다. 기상나팔 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세면장에서 동기들이 물었다.
"종호야, 너 파견근무 간다면서. 진짜야?"
"응, 응."
"5분 대기조도 빠진 거 맞아?"
"그, 그래."
동기들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뿌듯했다.
아침을 배불리 먹고 교회로 향했다. 단독 군장으로 연병장을 향하는 무거운 군화 발자국 소리에서 벗어나듯, 나는 언덕길을 한 마리 제비가 되어 날아올랐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언덕 위 교회가 보였다. 빛바랜 하얀 페인트, 낡은 철재 십자가 탑. 어제와 똑같은 풍경인데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따뜻하고,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김 상병은 엄숙한 기도로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께 알렸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기도하는 법을 몰랐지만, 그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감사합니다.'
커피 향이 아담한 막사 공간을 채워 나갈 때쯤, 김 상병은 나에게도 커피 한잔을 내밀었다.
"자, 종호야. 커피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
커피를 받아 들었다. 처음 마셔 보는 커피였다.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감싸니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김 상병은 커피를 마시며 점등식 준비의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점등식은 커다란 스위치가 설치된 점등탁자를 중심으로 행사가 진행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단장님이 스위치를 누르면 십자가 철탑을 타고 치솟아 오른 불빛이 교회 주변과 교회 앞 잔디마당으로 쏟아져 내리며 화려한 장관을 펼칠 거야."
상상이 되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불빛이 쏟아지는 모습.
"이때 군악대 팡파르가 울려 퍼지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와 동시에 교회 건물을 따라 전구들이 차분하게 빛나고, 마지막으로 교회 입구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게 빛날 거야."
눈앞에 그려졌다. 그 화려한 장면이.
"이렇게 모든 조명이 밤하늘을 장식하는 순간, 군악대의 반주로 내가 초대한 성가대의 찬양이 아기예수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는 거지."
김 상병의 목소리가 그려주는 크리스마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만드는 일에 내가 함께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