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점등식
소령은 김 상병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군악대 담당 장교가 김 상병의 대학 동문 선배라 일이 쉽게 풀린 것 같아. 김 상병이 구상하고 있는 점등식의 취지를 설명했더니 일정을 잡아 주더라고. 자네에 대한 칭찬이 끝이 없더군."
"그것보다도 집사님의 믿음과 관심에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소령은 흐뭇한 미소를 금세 접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진지한 어조였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어. 김 상병이 단장님을 크리스마스 점등식에 초대한 건, 강건한 믿음과 진정한 용기가 있지 않고서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종교 활동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단장님 아니셨나. 크리스마스 점등식 행사를 계기로 하나님의 복음을 단장님에게도 전하겠다는 김 상병의 큰 믿음이야말로 종교를 가진 장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어."
"하나님의 깊은 뜻입니다. 무관심 속에 교회는 낡을 대로 낡았고, 우리들만의 정체된 예배에 근심 어린 하나님의 핀잔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데, 어찌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김 상병의 구상대로 이번 크리스마스 점등식을 계기로 교회 재건축을 단장님에게 건의할 생각이야. 우리 행정실뿐만 아니라 뜻 있는 장교들도 큰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야."
"크리스마스 점등식을 위해 제가 사회에서 몸담고 있던 교회의 대학부 성가대가 봉사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방문절차를 부탁드립니다."
행정병들이 일제히 환호를 내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 어깨가 움찔거렸다. 소령 바로 앞자리의 병장이 무언가에 홀린 눈빛으로 김 상병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대학부라면 어여쁜 자매님들도 당연히 있겠지?"
"이봐, 안 병장. 지금 그런 이야기가 중요한가."
병장은 소령의 어색한 눈치에 오히려 더 흥이 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 낭송이라도 하듯 그럴싸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잡았다.
"상상해 보십시오! 고요하고 거룩한 밤. 화려하고 따스한 불빛이 춥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아름다운 천사의 찬양소리가 울려 퍼진다면, 제 아무리 굳게 닫혀 있는 단장님의 마음이라도 활짝 열고 말 겁니다."
행정실은 금세 웃음바다가 되었다. 소령은 이윽고 구석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또 다른 선물을 감춰둔 넉넉한 산타의 표정으로 김 상병을 환하게 바라봤다.
"김 상병이 부탁한 사병이야. 우리 부대에서 유일하게 전기공사 기능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더군."
"교회가 낡은 목조 건물이라 아무래도 전기를 잘 다루는 일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투중대에서 파견근무로 돌리는 것은 규정상 힘들지만, 이번 행사는 사안이 중요한 만큼 힘을 모아야지. 내무생활에 지장 없도록 작업 시간 잘 조정해야 하는 것, 잊지 말고."
어색하기만 한 이 분위기와 이해하기 힘든 이들의 대화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기억을 되찾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부에 지지리도 소질이 없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의 바람대로 자격증 하나만은 꼭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필기 전형에서 번번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실업계 재학생에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필기 면제 기회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김 베드로 상병을 따라 부대 중앙도로를 걸었다. 벌겋게 물들어 가는 연병장 너머 겨울하늘이, 웬일인지 따스하고 평안하게 느껴졌다. 1대대 막사를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언덕에 다다르자 빛바랜 하얀 페인트가 어울리는 아담한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십자가를 받치는 낡은 철재 탑이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아늑하게 보였다.
교회 바로 뒤편에는 장교식당과 테니스장이 있었다. 그 너머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택마을의 여러 색 지붕들은 오랜만에 보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김 상병은 교회 바로 옆 작은 막사로 나를 데려갔다. 아담한 공간에 소파와 테이블, 많은 책들이 수납된 책장이 배치되어 있었다. 작은 창문 너머로 해살이 들어왔다.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그림 한 장이 나의 눈과 가슴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한 마리 어린양을 품에 안은 선한 목자가 있다. 문득,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설렘이 선한 목자의 품에 안긴 저 어린양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