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보다 강한 삶의 이야기.

추석, 춘천을 다녀와서

by 구현

올여름엔 가족들과 휴가를 가지 못했다. 추석 연휴만큼은 어디든 가보자 싶었다. 아내가 춘천이 좋겠다고 했고, 아들들도 닭갈비가 먹고 싶다며 동의했다. 당일치기였지만, 다산에서 춘천은 그리 멀지 않았다.


점심 메뉴로 정한 닭갈비 맛집까지는 아직 시간이 일렀다. 아내가 김유정 문학촌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아들들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나는 흔쾌히 목적지를 바꾸었다.


약한 비가 내리다 그친다는 기상청 예보를 믿고 나섰지만, 비는 그칠 기미는커녕 점점 굵어졌다.


잘 꾸며진 문학촌의 산책로를 가족들과 천천히 걸었다. 비에 젖은 문학촌은 고즈넉했고, 서서히 물들어가는 나뭇잎이 가을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산을 접고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이 있었다.


김유정 작가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이 담긴 명판 앞이었다. 무거운 공기 속에서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에 숨을 멈춘 듯 한참을 서서 글을 읽었다.


돈, 돈, 슬픈 일이다.


29살의 젊은 작가는 친구에게 이 절절한 편지를 보내고 11일 뒤에 생을 마감했다. 탐정 소설을 번역한 돈으로 닭 서른 마리를 고아 먹으면, 이 끔찍한 병마에서 벗어날 거라는 그의 애절한 소망과 절망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빠, 뭐 보세요? 좀 서둘러 가야 될 것 같아요. 닭갈비 집에서 줄 엄청 서야 된데요." 아들이 다가와 말했다.


닭갈비 맛집에서 1시간을 기다려 점심을 먹었다. 소양강댐을 둘러보고 삼악산 호수케이블카도 탔다. 기상청의 예보는 빗나갔고, 비는 그치지 않았다. 케이블카는 빗속의 산을 힘겹게 올랐다. 비에 젖어 희미하게 번진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나는 오늘 하루가 얼마나 귀한지 생각했다.


젊은 시절 호기롭게 뛰어든 사업이 망했다. 밑바닥을 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 나는 일이 없어 힘들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아내와 두 아들, 가족과 함께 춘천에 왔다.


오십 중반을 넘어서야 겨우 공공임대 아파트에 입주를 했다. 음식 메뉴나 옷의 메이커보다는 가격표에 먼저 눈이 가는 인생을 살아왔지만, 우리는 함께 였다.


돈, 돈, 슬픈 일이었지만, 김유정 작가는 귀한 작품과 영원히 남을 문학촌을 남겼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친구에게 돈을 구걸하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오직 '일'을 갈구했다.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병을 치유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의 삶에 대한 품격은 이 편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졌다. 그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도 결국 사랑하는 이들과의 삶이었을 것이다.


춘천에서 돌아오는 길,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렸다. 묵묵히 운전만 하는 나를 아내가 힐긋 살피다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돈, 돈, 힘겨운 일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돈이 아니다. 오직 먹고살려는 돈이다. 그래서 더 절실하고, 그래서 더 소중한 돈이다.



문학보다 강한 그 삶의 이야기가 나에게 속삭였다.


아주 가끔 가족들과 이렇게 바람 쐬러 갈 수 있다는 것, 함께 밥을 먹고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이 평범한 순간들이 바로 행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