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부딪히고 깨진 나를 다시 이어 붙였어요
어쩌다 작가 에세이 시리즈는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도 작가의 꿈을 꾸고 있는 많은 분들을 응원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 작가님들이 어떤 시련과 즐거움을 거쳐왔는지 들여다보고 기운을 얻어 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편의 ‘어쩌다 작가’ 에세이에 참여하신 신조하 작가는 낮에는 변호사로 일하고 퇴근하고 밤이 되면 '로봇 뇌를 가진 변호사가 AI 범죄에 관련한 사건들을 풀어나가는' 내용의 장편소설을 쓰고 있죠. 같은 아이디어로 데뷔한 단편소설로 2022년 SF어워드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신 작가님은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작가가 되는 사람은 한 번씩 부서져본 사람이다. 사람이 부서지기 위해서는 사회나 인물과 갈등해 보아야 한다. 깨진 자신을 하나하나씩 이어 붙여보지 않은 사람은 새로운 세계(이상적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제게 소설을 가르쳐주신 스승님도 다음과 같이 신 작가님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소설이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 거기에 주제를 담아 자신만의 문체로 드러내는 문학 장르이다. 소설에서는 보편화가 아니라 구체화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끌어낸다. 기존의 보편성에 흠집을 내고 그 한계를 깨뜨림으로써 더 넓고 깊은 보편성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험과 도전의 세계이다.
사실 저는 스승님에게서 소설 작법도 배웠지만 그보다 예술가로서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항상 치열하게 현실과 갈등하며 이상을 향해 신나게 (모험과 도전) 나아가는 자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의 혁명가가 소환되기를 바라며 신 작가님의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기획자 윤여경, 퓨쳐리안 대표-
" 작가가 어떻게 되는지 나는 모른다. 그걸 알았다면 나는 진즉 작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작가가 되는지(또는 되려고 하는지) 나는 안다. 작가가 되는 사람은 특별한 mbti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나는 enfp이다. 따라서 내가 작가 지망생이라고 하면 모두가 놀란다. 또한 작가가 되는 사람은 어마어마한 창의력이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사람도 아닌 것 같다. 작가가 되는 사람은 한 번씩 부서져 본 사람이다.'"
사람이 부서지기 위해서는 무엇에 먼저 부딪혀야 한다. 그 무엇은 세상이나, 사회나, 특정 인물이나,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깨져보지 않은 사람은, 그래서 깨진 자신을 하나하나씩 이어 붙여보지 않은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어쨌든 판타지/SF를 씀에 있어서는 그렇다고 느낀다.
내가 소설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아니 나만의 세계를 창조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외국에서 수년을 살다가 갑자기 한국 중학교에 전학을 온 생뚱맞은 이방인이었고, ‘일진’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전학을 온 첫날, 여전히 어벙한 얼굴로 교실을 둘러보고 있는 내게 칼같이 각진 앞머리를 한 몇몇 소녀들이 맨 뒷자리에 앉아 멀리서 나를 불렀다.
“야, 너 일루와 봐.”
그리고 그때였다. 내가 앞으로의 인생을 바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그 순간 ‘그쪽으로’ 가지 않기를 결심한 것이다. 채 1초가 되지 않는 그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는 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않음으로 인해 앞으로 벌어질 내 인생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무엇인가는 가지 말아야 한다고 나를 붙잡았고, 그 무엇이 나를 바로 작가의 길로 인도했다고 믿는다. 나는 가는 대신 대답했다.
“네가 와.”
그 이후의 일들은 생각보다 과격하다. 일진 소녀는 분노하여 내게 다가와 출석부로 내 머리를 후려치려고 했고, 나는 멋지게 그 출석부를 한 손으로 막고 발로 그녀를 찼다. 그리고 난투극이 벌어졌다. (나는 아직까지도 내가 이겼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가족들이나 지인들 사이에서 박장대소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소재로도 매우 훌륭하게 써먹고 있다.
그러나 당시 나는 15세 사춘기를 겪고 있는 소녀였고, 중학교는 이런 이상 분자를 용납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난투극 이후 나는 철저히 소외되었고, 내가 무너졌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난투극 이후 일진들은 아이들에게 나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고, 폭거에 조용히 고개 숙이며 나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는 교실의 소녀들, 원숭이를 구경하듯이 웃으며 손가락질하는 아이들, 경멸하듯이 바라보는 선생님들의 눈빛들로 인해 나는 인간에 대한 나의 세계관이 철저히 부서지는 것을 경험했다.
잿더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루 종일 만화책과 소설을 읽으며 공상을 하는 것이었다. 공상 속에서 나는 초능력자였고, 마법사였고, 반지원정대 중의 하나였으며 엔터프라이즈호의 선원이었다. 나는 상상의 세계들로 부서진 내 세계와 나 자신을 조금씩 기워갔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가장 큰 무기이자 방패라는 것을 습득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해 모두에게 복수를 하겠다! 는 야심 찬 계획을 진행시켜 어찌어찌 변호사 자격증까지 얻었으나 복수심은 이미 풍화해 버린 지 오래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부를 잘해서는 특별히 복수를 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쪽에 가깝다.)
결국에는 공상과 망상의 누더기로 기워진 나 자신과 내 세계가 남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닫게 된 것이다. 어떤 형식이든 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15살의 나를 살려준 것은 그 누군가가 새롭게 창조해 준 그들만의 세계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빚을 진 자들은 또 자신만의 세계를 남겨야 할 빚을 진다는 것을.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내가 굳이 소설을 쓰는 것은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이제 습관에 가깝다.
나는 이미 망상과 상상을 하는 인간으로 새로 기워진 것이다. 엔트로피는 증가할 뿐이다. 한 번 부서졌다 이어 붙인 인간은 그 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대신 그 인간은 작가 지망생이 되고, 운이 좋으면 언젠가는 작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