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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장공장장 Aug 21. 2023

뮤지컬 사칠4

구급일지

1. 디테일

나는 대본을 쓰거나 글을 수정할 때 주로 피시방을 간다. 헤드셋을 착용하고 유튜브에서 '백색소음'을 틀어 놓는다. 물론 처음부터 피시방으로 가는 건 아니다. 작업실을 간다-피시방 A를 간다-피시방 B를 간다. 뭐 이런 순이다.


글이 잘 안 써지는 경우에는 역순으로 해본다. 피시방 B를 간다-피시방 A를 간다-작업실을 간다. 아니면 다르게 하는 방법도 있다. 피시방 A를 간다-피시방 B를 간다-다시 피시방 A를 간다, 등등. 방식은 무궁무진? 하다.


피시방에 간다고? 당연히 지인 작가들은 신기해한다.

거기 가면 글이 잘 써지니? 응, 그냥 뭐... 나만의 루틴이야.


그래서 서울, 광주, 원주에는 내가 자주 가는 피시방이 있다. 지역마다 단골 피시방이 두 곳 씩 있는데, 그곳에서 아이스 믹스 커피를 서너 잔씩 마시고, 흐음... 에... 각설하자. 생각해 보니 그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여하튼, 지금 나는 서울이고, XX부근에 있는 피시방 A에 있다. 거기서 뭐 하냐고? 대본을 보는 중이다. 무슨 대본? 당연히 사칠 47이지. 공연이 코 앞인데.


지난주 금요일, 서울에 오자마자 연습실로 갔다. 연출님은 대사 몇  줄, 가사 몇 소절을 이러저러한 느낌으로 뉘앙스를 바꾸는 건 어떨까요, 라고 제안한다. 이러저러한 씬이 있는데 이러저러하다 보니, 이러저러하게 하면 공연이 더욱 좋아질 것 같다는...;;; 디테일하게 내용을 쓰고 싶은데 다 스포라 '이러저러하게'로 통일한다;;;;


나도 알고 있다. 공식적?으로 작가가 할 일은 끝났다는 것을. 다음 주가 공연인데 대본을 '이러저러하게' 고치고 있으면 그건 난리가 난 거지.(웃음) 디테일, 그러니까 이건 디테일이다. 정교함을 추구하는 미학의 과정? (풉, 퍽이나!!!) 배우님들의 의견, 연출님의 판단, 작곡가님, 기획팀의 피드백 등등. 그래서 나도 이러저러하게 고쳐 본다. 이런 과정이 금요일부터 시작해서 일요일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그러는 사이, 사칠 갈라쇼가 시작되었다.  


... 잘하고 있겠지?


많이 궁금하다. 관객 분들 앞에서 배우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처음으로 '가사까지' 공개한 사칠의 넘버들이다. 관객과 팬분들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각자가 할 일이 있고, 나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본을 고치는 것이지만, 에이, 광주에서 올라왔는데 하필이면 작업과 겹칠 게 뭐람? 물론, 스텝 분들이 거기? 에 있다. 때문에 현장 상황이 어떤지는 스텝 카톡방으로 전송이 된다. 끄적거리는 사이 그쪽? 이미지가 올라온다. 와, 팬분들이 정말 많이 오셨구나. 후후... 걱정할 필요 없다. 우리 쪽에서는 모찌님과 A타입님이 출동했다.

출처/네오



2. 선곡

몇 주 전 이야기. 대학로에서 사칠 팀이 넘버를 부른다고 한다. 우리들은 팬 분들에게 어떤 노래를 들려줄지 이야기를 나눈다. 노래 A가 좋지 않을까요? 저는 B도 좋은 거 같아요. C도 있잖아요. 창작진들과 기획팀의 대화가 오간다. 지면을 빌어 감히 말씀드리자면 난 모든 넘버들이 좋다. 작곡가님이 자신의 영혼을 갈고 HP를 소모해 가며 만드셨다. 마치 연금술을 하듯이, 힐러도 없는데 말이다. 뭐, 여하튼. 그럼에도 굳이 개중에 한 곡을 뽑아야 한다면 넘버 D를 추천하고 싶다.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며 정원이와 이준이의 심정을 대변한 이 곡은... 잠깐!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가 아주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근데 우리 노래 나가면, 다 스포인데?


두둥!


앗. 그런가? 가사들을 확인해 본다. 앗. 그렇구나!


내가... 이 내가... 다 스포가 되는 가사들로 썼군하아아아!!!!!


다시 회의가 시작된다. 스포가 아닌 노래들만 추려보자. 우리 공연의 정체? 가 드러나는 곡들은 우선순위에서 제외! A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제외. B는 저러저러한 이유로. C와 D는 그러저러한 이유로. 그나마 내용이 덜 언급되는 걸로. 그러니까, 아아, 그러니까...


... 두 곡 남았는데요? 아니, 세 곡인가...


출동을 나간다, 이 시간 지나고 나면... 구급일지?


근데... 소미 나오는 건 괜찮아요?


소미는 뭐... 괜찮지. 그렇죠? 작가님?


네에... '베란다에서 사라진 손녀' 정도는 뭐... 근데...


예?


... 소미가 아니라 솜이인데요.


아아, 넵...


다시, 이야기가 오고 간다.


잠깐. 이 시간 지나고 나면 이러저러하니까 저러이러할까요?


아, 맞네. 그러저러하니까, 이렇게 해야겠네, 그쵸, 작가님?


... 네. 스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다 빼고... '노래'만.


 어쩌면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좌측부터 모찌님 A타입님 출처/네오



3. 구급일지

정확한 표현은 '구급활동일지'이다. 119 구급대가 쓰는 기록용지이다. 출동 날짜와 시간, 환자의 상태 및 이송기록, 그리고 출동대는 누구였는지, 등등을 쓴다. (대략적인 것만 언급한 건데 실제로 일지는 훨씬 디테일하다) 환자는 급성질환자, 만성질환자, 사고부상환자, 정신질환자로 구분한다.


상황실

남양구급 1호 출동. 남양구급 1호 출동. XX동 XX아파트. 사고부상환자.


구급대

상황실, 남양구급 1호 출동.


상황실

사칠. 14시 21분.


내가 복무했을 때 119 구급대는 3인 1조였다. 운전을 하는 소방관, 응급구조사 소방관, 의무소방원, 이런 식이었다. 대체적으로 응급구조사는 보조석에 착석한다. 운전을 하는 소방관은 당연히 운전석에 타고... 의무소방원은 앰뷸런스 뒤쪽 공간에 탄다. 그곳에는 주 들것을 비롯하여 각종 구급 장비가 실려 있다. 때에 따라서는 응급구조사와 의무소방원이 탑승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 사건 사고에 따라서 탄력적으로 운영한다.


뭐, 여하튼,


조금 전 상황실에서 '사고부상환자'라고 했다. 환자 구분 명칭으로 보건대 뼈가 부러졌거나, 낙상 등의 사고가 생겼을 것이다. 상황실에서 출동 지령을 내리면서 '환자 구분을 하는 것'은 미리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응급구조사 소방관은 상황실과 무전을 하며 환자의 구체적인 상태를 묻는다.


구급대

상황실, 여기 남양구급 1호인데 환자 상태 어떤지 자세히 설명바람. 사육?


상황실

사칠. 아파트 계단에서 20대 남성이 미끄러져서, 손목을 다쳤는데...


예상대로다. 사고부상환자는 대게 그런 경우니까. 의무소방원은 뒤쪽에서 여러 구급 장비들을 챙긴다. 일단 뼈가 부러졌을 수도 있으니까 '부목'을 챙기고... 넘어져서 피가 났을 수도 있겠지? 소독약이랑 솜, 거즈... 이건 순발력이 요구된다. 빠릿빠릿해야 한다. 현장에 가서 구급장비들을 챙기면 늦다. 출동하는 동안 미리미리 준비해 둔다.  


상황실

근데 환자가 허리 통증도 호소하고 있으며...


앗, 허리? 그럼 그냥 들 것을 가지고 가면 안 되겠네. 허리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까. 분리형 들 것을 챙겨야겠다. 앞 좌석에 앉은 응급구조사 소방관도 여러 상황을 시뮬레이션 중이다. 화재 현장이랑 비슷하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경방(불을 끄는 소방관)이 피융, 하고 달려가듯이, 응급구조사 소방관도 마찬가지이다. 구급통을 들고 우다다다, 달려갈 것이다. 의무소방원도 같이 뛴다. 옆에서 보조해야 한다.

좌측부터 들 것, 분리형 들 것 출처/세이프넷


분리형 들 것은 말 그대로 '분리'가 된다. 환자발생! 저기 허리가 다친 환자가 쓰러져 있다. 응급구조사 소방관이 구급 처치를 하고 있는 사이, 의무소방원과 운전 소방관은 들 것을 분리한다. 환자의 등 뒤로 '분리된 들 것'을 좌우에서 조심스레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다시 들것을 합체한다. 딸깍, 소리가 나면 제대로 결합된 것이다. 천천히 들것을 든다. 이제 병원으로 이송하면 된다.


그럼 이런 상황은 어떨까?

상황실에서 다음과 같은 출동 지령이 왔다고 가정하자.


상황실

남양구급 1호 출동. 남양구급 1호 출동. XX동 XX아파트. 만성질환자.


만성질환자? 지병을 이미 앓고 있는 경우다. 독거노인, 무선페이징 대상자들도 거의 대부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아무래도 급성질환자나 사고부상환자보다는 좀 더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겠지? 물론, 만성질환자였던 무선페이징 대상자가 출동 중에 급성질환자로 바뀌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래서 119 구급대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여 탄력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구급대

상황실 남양구급 1호 현장 도착.


상황실

현장도착. XX시, XX분.


현장도착 시간도 당연히 구급일지에 기록해야 한다. 물론, 지금은 환자를 응급처치하고 병원에 이송하는 게 우선이다. 시간 기록은 구급이 다 끝나고 해도 된다.


구급대

상황실 남양구급 1호 환자 1명 XX병원으로 이송.


상황실

사칠. XX시, XX분.


응급처치를 잘하고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한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119 앰뷸런스가 빠른 속도로 병원 응급실 앞에 도착한다.


구급대

상황실 남양구급 1호 병원도착.


상황실

사칠. 남양구급 1호 병원도착. XX시, XX분.


당연한 말이지만, 이 무전기록은 자동으로 녹음이 된다. 여러 이유가 있다. 법적 증거로도 활용되기도 한다. 구급대는 환자를 병원에 인수인계한다. 모든 조치가 끝나면 복귀해야겠지?


구급대

상황실 남양구급 1호 병원출발.


상황실

사칠. XX시, XX분.


구급대가 소방서로 무사히 귀소 했다. 다시 무전을 하자.


구급대

상황실 남양구급 1호 귀소.


상황실

귀소. XX시, XX분.


구급차를 주차하고, 응급구조사 소방관은 내선, 혹은 본인 스마트폰으로 상황실에 전화를 건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황실 내선 번호로 전화를 거는 것이다. 절대 '119'를 누르지 않는다;;;


구급대 아무개입니다. 저희 출동시간 다시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러면 상황실에서 출동, 현장도착, 출발, 병원 도착 등등 시간을 가르쳐 준다. (상황실도 상황일지라고 해서 똑같이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응급구조사 소방관은 구급활동일지에 이를 기록한다. 구급일지 작성 끝. 이제 이 일지를 따로 잘 보관하고 있으면 된다.  


보다시피 의무소방원은 보조 역할이다. 화재, 구조, 구급 이 모든 일들은 소방관들이 주도적으로 하는 업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겁난다. 일반인 신분에서 갑자기 군인(의무소방원)이 된 사람들이다. 긴장되고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계급이 오르고 짬이 차면 이게 괜찮긴 한데. (상방/상병쯤 되면 날아다닌다 피융~) 그런데 그건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이고.


특히, 신병들한테는 매 순간이 공포다. 현장 나가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잘해야 돼.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들이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하도 겁이 나서, 신병 때는 남몰래 기도했었다. 제발 우리 관할 구역에서 '내가 출동을 나가야만 하는' 사고가 나지 않게 해달라고. 작게는 개인의 바람을, 크게는 우리나라의 무사고를 바라는 순수하고 원초적인 기도였다.


#이 시간 지나고 나면.

출동을 나가면 불안해

사고현장 무섭지 않은 사람 어디에 있을까

처음엔 나도 두려웠지

매일매일 힘들고 오늘하루 무사하길 바랬지


#구급일지.

자살 시위 노동자 투신 소동

그때 나는 무서웠었지

형은 괜찮다고 했어

그 남자를 설득했지

잊지 못할 그날이었어


#출동을 나간다.

솜이를 찾자 서둘러 급해

베란다에서 사라진 손녀


위 가사들은 모두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다. 의무소방원 때 출동을 나갔던 일들을 가사로 쓴 것이다.


이 시간 지나고 나면

오히려 그리워질 거야

화재 현장 구조구급

우리들 청춘이 함께한

이 시간 지나고 나면,


살면서 이따금 '그 시간'이 그립기는 한데,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생각해 봐. 누가 군대 시절로 다시 가고 싶겠어;;; 근데 그 시절 소방서 장비계 창고는 잘 있으려나?  내 이름이 적혀있는 구급활동일지는 그곳에  있을까? 먼지가 수북이 쌓여서 가지런히 꽂혀 있는... 에이, 아니지. 세월이 그렇게 지났는데 아마 폐기되고 없을 거야. 아휴, 청승금지. 다음 주가 공연이다. 다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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