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가 어리버리해서 미안해, 딸
“<서울의 봄> 영화 보고 싶다.”(나)
“엄마, 내가 예매해 줄까요?”(큰 딸)
“언니, 이번엔 엄마한테로 표 보내~”(작은 딸)
“엄마한테..? 아~ 맞아, 아빠한테는 안 보낼 거야!”(큰 딸)
"... 성인 2명이라니... 크하하~~"(작은 딸)
급 뾰로통해진 큰 딸과 한바탕 큰 웃음을 터뜨린 작은 딸과 나...
우리에겐 영화표와 관계된 어이없는 과거가 있다.
지난여름, <엘리멘탈>이라는 애니메이션이 개봉했고 남자 친구와 아주 재미있게 그 영화를 보고 온 딸은 영화의 내용이 무척 마음에 들고 감동적이었던 것 같다.
물과 불이라는 함께 할 수 없는 거의 상극에 가까운 두 원소가 만나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결국은 사랑의 결실을 맺는 스토리에서 현재 교제 중인 자신들의 이야기에 25년 넘게 부부로 삶을 살아온 엄마, 아빠의 이야기가 겹쳐 보였는지 다짜고짜 이 영화는 엄마 아빠가 꼭 봐야 한다며 표를 예매해 주었다.
인터넷으로 구입한 모바일 티켓을 아빠에게 전송하고, 영화를 보고 나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다며 상영 시간까지 꼼꼼하게 챙겨서 정성껏 우리 부부를 배웅해 주는 열정을 보인 딸...
그러나 슬프게도 딸아이의 크나큰 기대를 한순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영화관과는 평소에 1도 친밀함이 없는 엄마, 아빠의 황당한 실수 때문이었다.
나와 남편은 둘 다 영화관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약간의 불안장애가 있어 어두컴컴한 상영관 내부에 오래 있는 것이 편치 않아서, 그리고 남편은 시간 낭비 같아서 등등의 이유로 둘이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은 한 손에 꼽을 만큼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도 나는 간혹 친정 엄마와 언니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아이들과 관람을 하기도 하는데 남편은 거의 동행하지 않으니 요즘 영화관을 이용하는 방법이 서투를 수밖에 없다.
딸아이가 한껏 신이 나서 예매를 해 주긴 했지만, 영화관에서 모바일 티켓으로 발권을 하고 상영관을 찾아가는 중에도 그리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우리가 여기 왜 온 거지?"
"그러게요, 뭔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냥 떠 밀려온 느낌이네요."
"그래도 딸아이 마음이니 좋은 시간 보냅시다."
시간이 조금 남아서 상영관 근처에서 입장을 기다리기로 하고 모바일 티켓을 자기 핸드폰으로 받은 남편에게 몇 번 상영관인지를 물었다.
티켓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남편이 "2 상영관"이라고 알려주었고, 얼마간 기다린 끝에 우리는 2 상영관으로 입장을 했다.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애니메이션이라 아이들이 많을 것 같았는데 어른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약간 어리둥절했다.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인가?'
자리에 앉아 영화의 시작을 기다렸다.
잠시 후 바로 내 옆자리에 어떤 여성이 와서 앉았다.
'이 분 참 특이하다. 자리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딱 붙어 앉게 좌석을 골랐을까..?'
좀 의아하긴 해도 크게 개의치 않고 예고 편들을 구경 했다.
예고편이 끝나고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는 것 같아 기대하는 마음으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스크린에 우리의 익숙하고 정겨운 배우 유해진 씨가 등장하는 것이다.
'뭐지? 아직 예고편인가? 아, 유해진 씨가 김희선 씨랑 영화를 찍었다더니 그건가보다.'
예고편인줄 알고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유해진 씨의 씬은 우리를 더 깊은 이야기의 전개로 몰입감 있게 인도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본편 영화가 상영되는 중이었던 것이다!!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남편이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내 티켓을 확인했고, 우리는 5 상영관을 가야 하는데 지금 엉뚱한 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라도 일어나서 제대로 찾아가면 되는 거였는데, 우리 둘은 영화가 시작되면 자리를 뜨면 안 되는 줄 알고 하는 수 없이 유해진 씨의 영화 <달짝지근해>를 강제 관람하게 되었다. 내 옆에 딱 붙어 앉은 여자분의 사정이 이해가 되었고 애니메이션인데도 왜 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이해가 되는 황당한 순간이었다.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유해진 씨의 연기력과 화려한 카메오들의 향연을 즐긴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그 시간을 마무리하고 극장을 나설 땐 딸아이에겐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참 어이없는 황망함과 허무함에 정신이 멍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남편은 뭘 보고 '2 상영관'이라고 했을까..?
"여보, 그런데 당신은 뭘 보고 2 상영관이라고 했어요?"
"... 성인 2명..."
맙소사...!
티켓에 성인 2명이라고 써놓은 것을 2 상영관으로 알았다니...
주차장 바닥을 부여잡고 숨넘어갈 듯 포복절도하는 나를 보더니 남편도 스스로가 민망한 듯 웃음을 터뜨렸고
둘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누가 보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웃었다.
차에 올라타 찔끔거리는 눈물을 훔치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어리버리하게 <엘리멘탈>을 놓치긴 했지만 그래도 기억에 오래 남을 영화관 나들이였다는 총평으로 나름 의미 있게 그날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들은 우리 큰 딸은... 제발 재밌는 일이 일어났었구나... 웃어주길 바랐으나
폭풍 같은 분노를 쏟아붓고야 말았다.
"아빠가 다 망쳤어~!!"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대성통곡을 하는 아이를 보고는 뭐 이런 일에 저렇게 흥분하나 싶다가도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만큼 특별한 마음으로 이 영화를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어 했고 그래서 그 실망감 또한 그만큼 컸구나 이해할 것도 같았다. 아이의 마음을 달래느라 진땀 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넷플릭스에서 <엘리멘탈>을 반드시 보는 숙제로 이 일이 일단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오늘 영화예매 이야기가 나올 때 반응을 보니 아직 섭섭함이 시원하게 가시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그날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
딸아이의 바람과는 달리 우리 부부에겐 평생 함께 웃을 수 있는 추억 하나 간직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주 만족스러운 영화관 나들이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모두가 딸 덕분이다. 그러니 어리버리한 엄마, 아빠를 용서하고 부디 마음을 풀어주길...
고맙다,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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