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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기쁨 Jan 21. 2024

내가 옆에 있어줄게요

남편도 늙는구나


한 15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던 중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노부부를 보았다. 몸집이 아주 작고 다리에 힘조차 넉넉해 보이지 않는 할머니는 한 손에는 이제 막 마트에서 구입한 물건들이 가득 든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작은 할머니와 지팡이에 온전히 의지한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는 할머니보다 몸집도 크고 힘도 세서 장바구니쯤은 거뜬히 들어 주고도 남았을 할아버지가 이제 할머니 없으면 혼자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으니 저 자그마한 할머니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버거우실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넋을 잃고 바라보다 문득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체격도 크고 건강한 사람이다. 평소에 병치레도 잘하지 않고 원래부터 3쾌(三快: 쾌식/快食, 쾌면/快眠, 쾌변/快便)를 타고 난 사람이라 웬만해서는 남편의 건강을 걱정해 본 일이 없다.

그리고 워낙에 겁도 많고 손 힘도 없는 나 대신 크고 작은 일들도 다 알아서 처리해 주고 장을 보고 난 후에 무거운 장바구니도 자기 혼자서 다 날라다 준다. 그럴 때마다 "오래오래 쓰려면 성능 좋을 때 아껴 써야지~" 농담을 하면서 나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꾸러미를 함께 들고 오기도 하지만 늘 내 마음에서 남편은 지금처럼 건강하고 마음 든든한 모습으로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다. 영원한 슈퍼맨 같은 남편... 그것 말고는 다른 상상을 하기가 어렵다.


15년 전 그날도 이 일이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현실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그때는 나나 남편이나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라 깊이 고민하지 않고 곧 잊어버렸다. 그 일은 일어난다 해도 아주 아주 멀고 먼 훗날의 일일 테니까...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닐지 몰라."   ©NAYOUNG 2024.




그런데 오늘 저녁 딸들과 티타임을 갖던 중 남편이 고민이 되는 듯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요즘 손톱이 좀 얇아진 것 같아요. 전에는 손톱 깎기가 어려울 정도로 두께가 있었는데 얇아지고 잘 부러지고 그러네..."


"아빠, 그러면 검색을 해보면 되죠. 원인이나 관리 방법 다 나올걸요."

큰 딸이 재빨리 휴대폰을 열고 '손톱이 얇아지는'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했다.


"원인은 단백질 부족, 스트레스, 과도한 네일아트.. 아, 이건 아빠는 해당사항 아니고.. 노화 등등이고요, 단백질, 칼슘, 비타민 E 같은 것들을 잘 먹어주래요. 그리고 건조하면 쉽게 부러질 수 있으니까 보습제를 잘 발라주라는데... 아빠 보습제 잘 안 바르죠? 일단 제가 쓰는 보습제가 정말 좋거든요. 그거 덜어드릴 테니까 자주 발라보세요. 그리고 영양제나 음식으로 영양보충하는 거는 더 알아보시고 관리를 좀 하셔야겠네요."


딸아이의 말에 아이처럼 조용히 귀를 기울며 듣던 남편은 딸이 보습제를 바르라는 말에 순순히 "알았다"라고 대답하면서 덜어 쓸 빈 용기를 찾았다. 얼굴이나 손에 뭔가를 바르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하던 남편이라 딸아이의 말 한마디에 이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처방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참으로 낯설기만 했다. 평소 같으면 "에이~ 싫어. 나는 뭐 바르는 거 귀찮아, 안 해."라고 할 사람인데 그동안 말 못 하고 속으로 걱정이 많이 되었었나 보다 하는 생각 하니 갑자기 측은해졌다.


영원한 슈퍼맨일 줄 알았던 남편도 노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일어나도 머나먼 훗날의 일일 거야 괘념치 않았던 일들이 남편의 몸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구나 생각하니 오늘 남편이 달리 보였다. 요즘 들어 머리도 희끗희끗해지고 고혈압 약도 먹고 전보다 뭔가 몸에 이상신호가 있으면 알아서 병원진료도 곧잘 받으러 다니기도 하는 것을 보면 남편의 몸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인데 나는 왜 아직도 남편이 힘이 넘쳐나는 청년인 마냥 생각하고 있었을까.

충분히 자각이 가능한 변화들을 목격하면서도 아직은 아니다, ‘일어나도 오랜 후에 일어날 일’이라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애써 외면해 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정말 남편을 ‘아껴 써야 할’ 때, 아니 ‘아껴줘야 할 ’ 때가 된 것 같다.

티타임을 마치고 평소처럼 자기 책상 앞에 앉아서 할 일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살그머니 껴안아주었다.


“손톱도 얇아지고 흰머리도 늘고.. 당신도 이제 나이 들어가는구나, 불쌍해라~

그런데 걱정하지 마요. 내가 옆에 있어줄게요.”

그랬더니 남편이 “뭐요~” 하며 밝게 웃어 주었다.




부부로 오래 살다 보면 서로가 짠하게 보이고 불쌍하게 여겨지는 때가 온다더니

우리가 어느새 그 길목에 들어선 것 같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불같이 뜨거운 사랑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은 은근하게 서로를 데워주는 따뜻하고 깊은 사랑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젊음도 힘도 시간이 가면 사라지겠지만 사랑은 여전히 우리에게 머무를  것이라 감사하다.


옆에 있어주겠다 약속했으니 먼저는 단백질, 비타민 등등 필요한 영양도 챙겨보고 성분 좋은 보습제도 하나 사줘야겠다. 그리고 오래오래 건강한 생활을 하도록 어떻게 남편을 아껴줘야 할지 계속 마음을 기울여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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