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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기쁨 Apr 06. 2024

50년 만에 처음으로 그 책을 펼쳤다

아버지의 결혼 1주년 기념 선물




엄마의 책장에는 60년이 넘게 꽂혀있는 5권의 책이 있다.

1963년에 계몽사에서 발행된 <현대여성교양강좌> 전집으로

두 분의 결혼 1주년을 기념하여 아버지가 엄마에게 선물하신 것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책이 우리 집 책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여러 번 이사를 다닐 때마다 집을 가득 채운 책들을 추려내어 도서관에 기증도 하고, 헌책방에 팔기도 하는 와중에도 결코 내침을 당하지 않는 귀한 몸으로 대접을 받을 만큼 엄마에게는 소중한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여태껏 한 번도 손에 쥐고 펼쳐본 일이 없었다.


누르스름해진 책 등, 읽기 어려운 한자들,

펼쳐보기는커녕 제목조차 제대로 다 읽어본 적이 없었고 오직 맨 첫 권의 제목이  <이브의 孤獨(고독)>이라는 것만 알 뿐이었다.



계몽사에서 출간된 여성교양 전집 5권. 옛날 계몽사에서 나온 책들은 믿고 보는 책들이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들른 친정에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생전 처음으로 그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이브는 왜 고독한 것인지, 이브가 고독하다는 것이 뭐가 어떻다는 것인지, 없던 호기심이 갑자기 발동하면서 나와 그 책의 첫 만남이 성사되는 순간에는 약간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래된 만큼 어쩌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와, 세상에... 나는 왜 이제야 이것을 보게 되었을까... 놀랍고 반가워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첫 장을 펼친 그곳에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고 힘이 넘치는 우리 아버지의 필체가 남겨져있었다.



"결혼 한 돌을 맞아, 사랑하는 아내에게

1963년 11월 25일"



아버지는 글씨를 참 잘 쓰셨다.  젊은 우리 아버지의 글씨는 내가 기억하는 그 어떤 아버지의 글씨보다 더  힘이 넘친다




서른 살의 젊은 우리 아버지가 스물둘, 젊은 아내에게 이렇게 썼다.

결혼 1주년을 맞아 아내에게 책을 선물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라고 마음을 새기다니… 우리 아버지가 언제나 점잖으시고 엄마에게 성실하셨던 분이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우리 시대 여느 아버지들과 같이 표현하시는 일은 극히 드문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토록 로맨틱하셨을 줄이야..


“엄마, 아버지가 엄마한테는 마음을 표현하시는 분이었어요?”

“느그 아버지가 내 한테는 잘해줬지.. 방해꾼 때문에 맘 놓고 못해서 그렇지…”

방해꾼이란 외아들에게 끔찍하셨던 우리 할머니다. 둘이서 바라보고 웃음만 지어도 샘이 나서 둘 사이를 비집고 드셨던 할머니 이야기는 이미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그런 할머니의 서슬 퍼런 감시를 뚫고 조용하지만 따뜻하게 엄마를 지켜준 아버지가 보고 싶으셨는지, 엄마도 오랜만에 펼쳐본 남편의 필체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계셨다.


여자는 그저 아들 낳고 시부모님 잘 모시고 집안일 잘하면 그만이었던 1960년대였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 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현대여성교양”에 대한 책을 선물하셨다. 한 번은 엄마가 매일 빨래하러 가시던 동네 빨래터에 어떤 여성이 온갖 액세서리로 치장을 하고 멋을 내고 온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가 퇴근하고 집으로 오신 아버지께 빨래터에 그렇게 요조숙녀처럼 꾸민 여자가 왔더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그 사람이 요조숙녀가 아니고 당신이 요조숙녀요.”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시대가 그렇다 보니 엄마도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아이 기르고 집안일하는 것이 일상인 삶을 사셨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으로부터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엄마로 하여금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살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브의 고독> 목차와 참여 작가들




케케묵은 이야기로 가득 찬 책이 분명하다 생각했지만 여기에 이름을 올린 분들의 면면을 보고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얼마 전 고인이 되신 이어령 님, 정비석님, 전혜린 님, 천관우 님, 구상님,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셨던 이태영 님 등등 내로라하는 한국 현대사의 지식인들이 총동원되어 있었다.


엄마도 책의 내용이 요즘 같은 시대에는 "약간 촌스러워 보이는 책"이라고 하셨는데, 목차나 대략적인 내용을 보더라도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고 만족할만한 여성과 여성운동에 대한 이해를 폭넓게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아직도 가부장적인 문화가 지배적이고 여성들이 관습에 예속되어 희생을 강요당받던 그 시대에 뜻있는 지식인들이 함께 펜을 들고 "이브의 슬픈 역사는 끝났다"라고 선언한 것은 그 자체로서 큰 의미를 지닌 일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고 안병욱 교수님은 이렇게 서문을 쓰셨다.


 "이브의 비극은 끝났다!

이브는 슬픈 운명을 걸어왔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역사의 긴 세월을 고독과 인종(忍從)과 수난의 가시밭 속에서 살아왔다.

이브는 아담의 어엿한 반려로 태어났지만, 하찮은 예속물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아담의 향락의 애완물, 이것이 이브의 억울한 운명이었다.

이브는 인생의 즐거운 향연에 떳떳이 참여하지를 못했다. 생활의 창조적 설계와 사회의 온갖 계획과 문화의 풍성한 건설과 역사의 줄기찬 창조에 대해서 이브는 아담의 믿음직한 파트너로서 떳떳이 발언하고 떳떳이 참가하지 못했다


... 그러나 이브의 슬픈 역사는 끝났다.

20세기는 여성의 자유와 해방의 세기라고 할 수 있다.

... 현대 여성은 무엇보다 교양에 대한 욕구와 권리를 갖는다...  진정한 교양은 올바른 인간형성을 의미한다. 교양은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이다. 미(美)에 대한 풍성한 감각, 생활을 질서와 조화로 이끌 수 있는 지혜, 옳고 그른 것을 정확히 판단하는 지성과 양식, 성실하게 사람을 대할 줄 아는 도덕적 품성, 이런 것이 진정한 교양의 요소를 이룬다. 현대의 여성은 교양을 통해 스스로의 인품을 높여야 한다. 그것은 곧 이브가 이브다워지는 일이요 아담의 아름다운 반려가 되는 길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뭔가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때가 1960년대 임을 생각하고 본다면 지금의 나와 우리를 있게 한 역사발전 과정의 한 지점을 목격할 수 있다는 면에서 가치 있는 글이라고 여겨진다.




50년 만에 처음 열어본 책 안에서 한 시대를 깨우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목소리를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들려주고 싶어 했던 젊은 날의 우리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제야 이 책의 가치를 알게 된 나는 엄마께 이것을 장차 내가 소장해도 되는지를 여쭤보았다. 엄마는 이제 볼 일이 뭐 있겠느냐시며 당장에라도 가지고 가라고 하셨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언제까지나 엄마가 아버지를 추억하실 수 있도록 엄마 곁에 그대로 남겨 놓고 <이브의 고독>한 권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것저것 할 일도 많고 읽을 것도 많은 내 책상 위, 쉽게 손 닿는 곳에 이 책을 놓아두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읽을 일이 없을 것 같던 이 책을 한 번씩 펼쳐서 읽는 것이 요즘 나에게는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데다 아버지를 비롯한 바람처럼 지나간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이 고풍스러운 책들... 나의 독서 생활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일까, 앞으로도 나는 이 책을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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