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다가올 AI사회를 미리 엿보는 디스토피아 SF소설 - 핸들
“진짜 시작이 될지, 또 다른 악몽이 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
운전자는 세라의 말에 덧붙였다.
“카일은 너무 의심이 많은게 문제야. 속고만 살아온 사람 같다니까.”
운전자의 이름은 카일. 43세의 베테랑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출신. 그가 이 어두운 터널로 들어온 건, AI가 통제하는 ‘완벽한 유토피아’가 사실은 거대한 사육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일은 차 트렁크를 열고 은빛 철로 둘러싸인 물건을 들어 올렸다.
도르르륵...
농구공 만한 구체 안에는 작은 쇠구슬이 몇 개 들어 있기라도 한 듯 흔들릴 때마다 도르륵 소리가 났다. 표면 어디에도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뚜껑 같은 것은 없었다. 마치 속이 비어 있는 커다란 쇠구슬에 또다른 작은 쇠구슬이 들어 있는 모양 같았다. 은빛 표면을 지닌 이 쇠공은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하듯 이음새가 단단히 용접되어 있었다. 세라는 이 물건을 커다란 지구본 모양의 거치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공의 위, 아래, 좌, 우, 앞, 뒤 여섯 방향에 진동 탐지기를 바짝 갔다 대었다.
“흐음, 혹시 이거 난수 생성기 인가?”
카일은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말했다.
“역시, 엔지니어 출신이라 금방 알아보는군. 이건 지금은 멸종된 하드웨어 기반의 진정한 난수 생성기야. 너가 목숨을 걸고 가져온 이 고철 덩어리가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열쇠지.”
“어렸을 때 옛날 사람들이 하드웨어 난수 생성기를 썼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게 아직 까지 남아있을 줄은 몰랐는걸. 근데 이걸 어디에 쓰겠다는 거야? 단순히 복권 번호나 조작하자고 나를 사지로 몬 건 아닐 테고.”
고개를 들어 카일의 얼굴을 바라본 세라는 옅은 미소를 지며 되물었다.
“엔지니어라면 난수가 뭘 의미하는지 알겠지?”
위잉~ 드륵, 드륵, 데구르르...
지직.. 삐- 삐빅- 지지직...
세라는 스위치를 올려 지구본 거치대 위의 쇠구슬을 돌리기 시작했다. 쇠구슬의 양 극단에 연결된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내부에 들어가 있는 작은 알갱이들도 같이 움직이며 소리를 내었다. 쇠구슬 내부에서 뻗어나오는 차가운 금속 마찰 소리는 어떠한 규칙도 찾아볼 수 없이 잡음만 낼 뿐이었다. 내부에서 뻗어나오는 소음이 구체 주변 공기의 미세한 떨림을 발생시켰고, 진동 탐지기를 거쳐 디지털 신호로 변환되고 있었다. 곧이어 검은색 모니터 화면에는 무작위 숫자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이제 진정한 난수를 얻게 된 거지. 카일, 너도 알잖아. 지금 바깥 세상의 무작위가 진짜 무작위가 아니라는거.”
“...의사 난수(Pseudo-random) 말이군.”
카일이 모니터를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무작위인 척하지만, 실상은 알고리즘으로 짜인 가짜 우연들.
“예측 가능하다는 것은 AI 시스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야. 안정적인 사회를 만들고 사람들을 통제하는데 필수적이거든. 인간은 늘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의 선택은 허용되지 않아. 안정을 깨버리니까.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 이게 AI 시스템이 추구하는 가치잖아?”
세라의 목소리 톤이 살짝 높아졌다.
“물론 우리는 그 철학에 반대하기에 여기에 모였지. 동의하는 사람들은 저 바깥에서 깨끗하고 안정된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이고.”
“AI에게 미래를 예측한다는 건, 단순히 계산을 잘한다는 뜻이 아니야. 애초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이 사회엔 사고도, 실패도, 우연도 없는 거야. 놈들의 시나리오대로만 흘러가니까.”
카일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말을 이어갔다.
“세라, 네 계획이 뭔지 알겠어. 지금 세상에서 결정되는 모든 일들은 사실 AI 시스템에서 이미 정해놓은 경로를 따라갈 뿐인 것이지. 정부의 정책, 주식 시장의 등락,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살지 조차도 이미 정해진 난수 확률로 생각을 유도하게 되어 있어. 단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거대한 난수 블록에서 선택되기 때문에 무작위처럼 보일 뿐. AI 시스템이라면 충분히 전체 난수 블록을 파악해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게 조작할 수 있는 거야.”
세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이 기계가 만드는 숫자는 달라. 이건 물체의 마찰, 공기의 저항, 온도 같은 자연의 혼란 속에서 만들어진 ‘진짜 우연’이지. AI의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없는 숫자야.”
카일은 그제서야 세라의 의도를 파악했다.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과 함께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각본에 없는... 숫자를 집어넣겠다는 거군.”
“그래. AI가 예측한 도로 상황, 전력 수급, 물류 이동...심지어
...병원에서 누구를 살릴지 죽일지도 모두 AI 시스템으로 결정하잖아? 그 모든 완벽한 계산식을 깨뜨리는거야. 원래 자연의 섭리로 돌아가는 거지. 예측에 미세한 오차라도 생기면, 놈들의 알고리즘은 낯선 변수를 해석하느라 과부하에 걸릴 테니까.”
카일은 맹렬하게 회전하는 쇠구슬을 응시했다. 그것은 단순히 노이즈를 만들어내는 기계가 아닌, AI 제국에 균열을 일으킬 작은 씨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