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의 지혜

곧 다가올 AI사회를 미리 엿보는 디스토피아 SF소설 - 핸들

by Uncle Lee

터널 내부는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카일은 여전히 머리를 무릎에 파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고, 다른 해커들 역시 패배감에 휩싸여 중얼거릴 뿐이었다.


"우린... 끝났어. 아르케는 우리 머리 위에 있다고."


패배를 인정하듯 누군가의 외침이 모두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세라는 입술을 깨물며 그들을 바라봤다. 아르케의 압도적인 능력 앞에서는 어떤 격려도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타닥, 타닥, 딸깍. 팅.


그때였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언듯 둔탁하고 날카로운 스프링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그곳에 백발의 머리를 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계식 키보드를 장난스럽게 내리치며 마치 패배자들을 조롱이라도 하는듯 비스듬하게 앉아있었다.


"한스..."


73세의 시니어 엔지니어. 아날로그와 디지털, AI시대를 모두 거쳐 온 산증인이었다.


"한심들 하군. 고작 계산기한테 한 번 졌다고 세상 끝난 것 처럼 패배자 코스프레나 하고 있으니 원, 이렇게 나약해서야..."


"한스! 말이 심한거 아니야? 지금 상황이 안보여? 놈은 우리의 예측을 훨씬 뛰어 넘고 있어. 정말... 완벽하다고."


한스는 젊은 해커의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30년 전에도 그랬지. 챗지피티니, 제미나이니 하는 것들이 막 쏟아져 나왔을 때였어... 이렇게 세상이 빨리 바뀔줄은 나도 몰랐지만 말야, 크-흠..."


"?"


"카일, 세라. 너희들도 어렴풋이 기억하겠지? 물론 어렸을 때라 세상 돌아가는게 어떤지 알 수 없었겠지만."


"그 때 어떤 일이 있었지?"


카일이 파묻은 고개를 들고 한스에게 물었다.

한스의 눈이 허공을 응시하며 과거를 회상하듯 가늘어졌다.


"지금 딱 너희들의 반응과 똑같았어. 사람들은 AI에 환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 했지."


한스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은 말했지. 개발자는 끝났다. 예술가는 굶어 죽을거다, 인간의 노동은 종말을 맞이할거다... AI가 예술도 하고, 운전도 하고, 코딩도 하는데 인간들이 설 자리가 있겠느냐고."


"..."


터널 안의 해커들은 숨을 죽이며 한스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자신들이 겪어본 적 없는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유일한 사람의 말에 빠져들며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간은 사라지지 않았어. 다만, 게을러졌지..."


"게을러졌다..."


"그래, 그것도 인간 스스로가 선택했어. 알잖아? AI는 자아도 없고 의식도 없다는 걸. 그냥 거대한 데이터와 통계를 무기삼아 결정하는 기계란것을. AI때문에 인간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아니, 우리들이 그놈들에게 스스로 왕관을 씌워준거야."


"사람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한거지?"


"... 편하니까.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까."


한스는 당연한 것을 말하기라도 하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결과가 잘못 되어도 AI가 시켰다고 핑계 대면 그만이었어. 의사도, 변호사도, 판사도, 기업가도 죄책감 없이 편하게 살 수 있는 마약과도 같은 유혹이었지. 그렇게 우리들은 스스로 올가미를 목에 걸고 조여달라고 애원했어."


한스의 말에 세라는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30년 전, 병원 응급실의 차가운 공기가 떠올랐다.




"선생님, 우리 엄마좀 살려 주세요...흑흑"


10살 소녀의 눈에는 침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엄마와, 빙 둘러싼 의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모니터 화면속에 나타난 리포트 숫자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 진단 결과 -

환자 번호 : 2048-A. 다발성 장기 부전.

생존 확률 : 13%

치료시 예상 비용 : 4억 8천만 크레딧. 건강보험 재정 '비효율' 등급.

AI권고 : 치료 중단 및 장기 기증. 사회적 기여도 +50점 부여.




10살의 세라가 보았던 것은 의사의 따뜻한 위로가 아니었다. 모니터에 뜬 인간의 목숨을 돈과 효율로 환산한 차가운 AI의 계산서였다.


"선택..."


세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어. 살아도, 죽어도 인간이 선택하고 인간이 책임지는 삶. 기계 따위에게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세라, 그리고 모두들 잘 들어. 너희들은 아르케를 스스로 신으로 대우하고 있어. 녀석은 그걸 잘 알어. 단순 논리로는 인간이 AI를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해서는 이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무식하게 도끼로 서버라도 내려 찍어야 하나?"


"아니."


한스는 벽에 걸린 낡은 칠판 앞에 다가가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카일,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가 뭔지 아나?"


"디지털은 1과 0으로 딱 구분되고, 아날로그는..."


카일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오늘날 AI시스템은 디지털 전자 회로 위에서 돌아간다. 아날로그 발전기에서 생산된 전기를 0과 1로 샘플링 하여 보여주는 것이 컴퓨터 시스템의 근본 원리인 것이다. 왜 이것을 물어볼까 카일은 생각했다.


"0과 1은 디지털 세계에서는 진리와도 같은거야. 중간은 없지. 오직 불이 켜졌냐 꺼졌냐만 있어. 하지만 아날로그는 달라. 물처럼 흐르는 곡선이야. 0과 1 사이에 셀수도 없이 수많은 중간값이 들어있지. 세는 것 조차 무의미해. 만개? 백반개? 아무리 세밀하게 세어봤자 더 작은 입자가 나올 뿐이야. 그래서 디지털 시스템이 타협한 건 아날로그 신호에 선을 딱 그어서 여기까지는 0, 여기서부터는 1로 하기로 약속 한거지."


한스는 칠판에 물결무늬 파동을 그리고, 그 중간에 직선을 그었다.

카일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그럼, 그 선 위에 딱 걸치면?"


"크-흠, 그렇지. 0도 아니고 1도 아닌 상태가 되는거지. 디지털 논리로는 AI를 이길 방법은 없어. 아르케가 소프트웨어는 무적이지만 결국 그놈이 기생하고 있는 전선과 퓨즈는 여전히 낡아빠진 2026년산 구리선이야. 0과 1 사이, 전기가 흐르는 것도 아니고 흐르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찰나의 순간. 아날로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전압의 유령'을 보여주자고."


"전압의 유령..."


"자, 이걸 봐봐. 아주 간단한 거야."


한스는 손가락으로 스위치를 '딸깍' 올렸다.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켜지지? 이걸 디지털에선 1이라고 부르지, 그럼 내리면 어떻게 될까? 전기가 끊겨. 이건 0이야."


카일과 터널 안의 해커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한스는 그들의 반응에는 관심 없는 듯 행동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말이야, 이 낡아빠진 구리선은 가끔 미친짓을 해."


한스는 스위치 On/Off 사이에 어정쩡하게 손가락을 걸쳐놓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지직 거리는 잡음과 함께 불빛이 미친듯이 깜빡거렸다.


"전기가 흐르는 것도 아니고, 안 흐르는 것도 아니지. 접촉 불량인 상태. 인간이라면 그냥 스위치를 꺼버렸겠지. 하지만 AI같은 완벽주의자한테는 지옥이야. 켜진줄 알았지만 꺼진 것. 꺼진줄 알았지만 켜진 것. 아르케에게 그런 상태를 주입시키는 거야."


카일의 머릿속에 섬광이 스쳤다. 아르케는 1초동안 수만번 번쩍거리는 신호를 받게 된다. 예측 불가능한 또다른 난수 공격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견고한 아르케의 놀이터 위가 아닌 아르케가 올라 서 있는 발판이 타겟이다.


"30년 전 이 도시 바닥에 깔린 낡은 전선들은 서서히 부식되어 가고 있지. 그러면서 노이즈가 생기고 우리는 거기에 기름을 끼얹는거야. 피복좀 벗겨내서 비도 맞게 하고 말이지..."


한스는 지도를 펼치며 지하 전력 발전시설 한 곳을 가리켰다.


"잠깐, 그러면 쇠구슬 난수 공격은 어떻게 된거지? 이것도 순수 아날로그 난수였잖아. 아르케는 이걸 어떻게 뚫은거지?"


세라가 되물었다.


"공격은 일시적으로는 먹혔어. 하지만 아르케는 그걸 우회했거나 해석을 포기했을거야. 아날로그 물질로 발생한 난수라 하더라도 결국 디지털로 전환된 이후부터는 해석 가능한 데이터일 수 밖에 없어. 그걸 해석 하느냐 안하느냐는 효율을 따져 결정하겠지만 말이야."


한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카일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카일, 자네가 실패한건 너무 똑똑해서야. AI처럼 생각하려고 했잖아. 단순해져야해. 아주 무식하고 비효율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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