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둔 디지털 쓰레기

곧 다가올 AI사회를 미리 엿보는 디스토피아 SF소설 - 핸들

by Uncle Lee

(약 30년 전. 겨울)


"한스, 아직 멀었어?"


젊은날의 한스는 모니터 불빛 아래서 피로에 잠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있었다. 커서가 truncate 명령어(데이터 전체 삭제) 뒤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


한스는 동료의 재촉에도 대답 없이, 마지막 엔터키를 누르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왜, 뭐가 문제 있어?"


"근데 말이야..."


한스는 타이핑 하던 손을 멈추고 말을 이어갔다.


"이거 정말 지워도 되는걸까? 별 가치가 없다고 하지만 다 역사의 한 장면인데 말이야."


타이핑을 멈춘 한스는 두 손을 팔걸이에 올리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곧이어 동료가 대답했다.


"이봐, 한스. 지금 AI가 왜 이렇게 헛소리를 해대는지 알면서 그래? 사람들이 인터넷에 싸질러 놓은 쓰레기 같은 글들, 작동도 안되는 스파게티 코드들, 편향된 뉴스... 그런것들만 잔뜩 주워먹고 자라니까 미쳐버린 거라고. 아무리 기술이 좋으면 뭐하나 데이터가 엉망인걸. 이건 데이터가 아니라 그냥 쓰레기야, 디지털 쓰레기."


2025년, AI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예상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AI 기술은 인류에게 경이로움과 동시에 깊은 실망감 또한 안겨주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1초만에 처리하는 AI지만, 반대로 인간이라면 하지 않을 실수, 꾸며낸 진실,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환각 증세역시 심각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이번 '아르케' 모델은 지금까지 등장한 다른 모델과는 달라야 해. 내부 벤치마킹 결과가 어떻게 나온지 잘 알지? 이건 정말 세상을 뒤엎을만한 기술이라고. 하지만, 거기엔 '순도 100%의 깨끗한 데이터'가 있어야 완성할 수 있어."


쓸모 없었다. 아니, 해로울 정도였다.

수억개의 작동되지 않는 불량한 코드.

술에 취해 쓴 찌질한 블로그 일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싸워댄 수백만개의 댓글과 욕설들.

AI 모델은 정제되지 않은 이 혼돈의 정보를 괴물처럼 먹어 치웠다. 그 결과 방대한 지식을 갖추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멍청한 천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까? 아니... 없겠지.'


한스는 한숨을 내쉬며 나머지 명령어를 타이핑 해 나갔다. AI가 지배할 완벽한 세상에서 이런 디지털 찌꺼기들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지막 엔터키를 치려다 잠시 멈칫 했다.


'... 쓰읍. 혹시, 모르잖아.'


엔지니어의 직업병이 도진듯 마지막 삭제 명령을 내리기에 주저하고 있었다. 지금 지우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격리 시켜 놓으면 언제든 폐기할 수 있다.


'그래, 굳이 내 손으로 태워버릴 필요까지는 없지. 아카이브 해놓자.'


한스는 truncate 대신 새로운 명령어를 입력했다.


[move to "/archive/sector_9"]


삭제 대신, 지하 격리 구역에 위치한 보존 서버에 데이터를 옮기는 명령이었다.


"다 끝났어. 이제 깨끗해."


한스는 동료에게 태연히 거짓말을 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지 엔지니어만의 철저한 백업 습관이 몸에 벤 탓이었을까? 아니면 미래의 자신에게 안겨줄 더럽고도 커다란 선물을 미리 숨겨놓은 것이었을까.


그날 밤, 지하 깊은 곳의 붉은 LED불빛만이 홀로 깜빡이며 그 비밀을 슬며시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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